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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승영의 책 속으로, 세상 속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읽기관리자2020-04-01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읽기


    글_노승영(번역가)




    티베트에서의 7, 황금가지, 1997

     

     우울한 책을 번역하다 보면 책의 정서에 사로잡혀 나도 우울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있다.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초록물고기, 2011)을 번역할 때가 그랬다. 대규모 화산 폭발과 지진,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불황, 테러리스트의 핵공격이나 생화학 공격, 3차 세계 대전, 석유 금수 조치, 계엄령, 외국의 침공, 기후 변화, 소행성 또는 혜성 충돌로 지금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지 못하고 삶의 기반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데, 내 처지에선 세상의 종말이 찾아와도 속절없이 당하기만 할 것 같았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때문에행동하지 않았으니 공모한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벌어지는 비극 앞에서 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아이슬란드 작가 안드리 마그나손의 시간과 물에 대하여(북하우스, 출간 예정)를 번역하면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 세계 빙하가 빠르게 녹고 있다. 인류 문명의 젖줄이자 어떤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생명수인 빙하가 일제히 사라지고 있다.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을 번역하던 2011년에만 해도 지구 종말은 미래형이었는데 이제는 현재형이 되고 말았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는 절박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역설적이게도 나를 지독한 우울에서 건져준 것은 지독한 분노였다. 빙하는 저자를 아이슬란드에서 히말라야 산맥으로 데려갔고 나도 그를 따라 태초의 암소 아우둠라가 있는 카일라스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티베트를 만났다. 저자가 우연히 달라이 라마와 인터뷰를 하게 되면서 나도 달라이 라마에 대해 궁금증이 들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거나 생존할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식물은 넓게 보자면 자연의 일부이며 우리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식물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새와 짐승도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살아 있고 감각 능력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감과 사랑을 그들에게까지 확장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싶었다.
     

    하인리히 하러의 티베트에서의 7(황금가지, 1997)20년도 더 전에 영화로 접한 적이 있었다. 내용은 다 잊어버리고 브래드 피트가 주연이라는 것만 기억나서, 이번 기회에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냥 영화로 만족해야 했다. 달라이 라마의 나라로만 알고 있던 티베트에 이렇게 많은 사연이 겹겹이 덮여 있을 줄이야. 1951년 티베트가 중국과 17개조 협정을 맺으며 외교와 국방을 포기하기 이전에도 자생적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고 인도의 네루 수상은 중국의 의도를 오판하여 티베트 독립을 외면하다 중국과 무력 충돌을 겪었고 인도가 이슬람의 침략을 받으면서 대승불교 경전이 티베트로 전해지고 번역되어 티베트가 초기 불교의 모습을 간직한 나라가 되었고 그럼에도 본교라는 무속 신앙과 불교가 기묘하게 결합하여 어떤 이들에게는 불교의 타락으로 비쳤다는 사실 등을 알기까지 대여섯 권의 책을 섭렵해야 했다.
     

    번역도 밥벌이의 일종이니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둬야 하건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에 잘못 빠지면 그만큼 마감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번역가에게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옮기는 것이다. 소비재가 아니라 생산재랄까. 하지만 가끔은 책이 수단에서 목적으로 바뀔 때가 있다. 의무로 읽는 책이 아니라 재미로 읽는 책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는 티베트에서의 7이 계기였다. 이 책만 읽고 말았다면 나는 캄파(티베트 동부 캄 지역에 사는 사람들)가 전부 도적이고 티베트 사람들은 불교를 믿으며 그저 순박하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을 테고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기까지의 역사와 그 이후에 벌어진 비극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티베트 최초의 공산주의 조직을 결성한 푼왕의 자서전 티베트의 별(실천문학사, 2009)에 따르면 승려와 귀족의 부패와 압제 때문에 민중이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지배층도 티베트가 낙후했음을 알고 개혁을 바라기도 했다. 심지어 달라이 라마도 마오쩌둥을 만나고서 그에게 감화되었으며 공산주의에 호감을 가졌다고 말했다. 푼왕은 티베트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중국 군벌을 몰아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이 티베트에 들어온 뒤에 자생적 공산당 조직을 인정받은 것이 고작이었다. 만일 티베트 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하여 중국 공산당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했으면 역사의 방향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역사를 가정하는 무리수를 둔 것은 그 뒤에 벌어진 사건들이 너무 비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티베트에 가한 잔학한 범죄는 티베트, 말하지 못한 진실(알마, 2008)에 조목조목 기록되어 있다. 100만 명에 이르는 티베트인이 중국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뿐 아니라 티베트어의 사용이 금지되고 불교는 말살되다시피 하고 자연 환경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이 시기 중국의 행위를 나치의 만행에 비견하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중국이 티베트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원나라와 청나라 때 중국이 티베트의 종주국이었다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몽골과 여진족이 한족과 티베트를 정복한 셈이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인도와 네팔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므로 네팔이 인도 소유라는 터무니없는 논리다. 티베트 비밀 역사(지식산업사, 2013)라는 책을 읽으면서 중국과 티베트의 오랜 관계에 대해 조금이나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가슴에 가장 아프게 남아 있는 것은 다큐멘터리 영화 다시 태어나도 우리의 주인공인 린포체(환생한 고승) 파드마 앙뚜의 슬픈 표정이다. 전생에 캄에 있는 사원의 주지였으나 라다크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자신의 사원에 돌아가지 못하고 박대받는 어린 린포체의 여정을 보면서 나는 의심의 방패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티베트의 승려 행세를 하다 정체가 들통난 롭상 람파가 사기꾼이고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린포체가 진짜인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둘중 한쪽이 권위를 가지는 근거는 무엇일까? 샹그릴라의 포로들(창비, 2013)을 읽으면서 티베트를 바라보는 시각이 끊임없이 달라졌다. 우리가 아는 것은 티베트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한 것 아닐까?
     

    지금 나는 좀 어리둥절하다. 한 달 전에 비해 티베트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았는데, 모순되는 정보들을 서로 소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도 이제는 티베트에서의 7같은 책을 읽어도 고지식하게 전부 받아들이진 않겠지. 게다가 책들과 씨름하면서 우울에서도 벗어났으니 꿩 먹고 알 먹고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그저께 영화 잃어버린 지평선을 보면서 서구인들이 티베트에 가진 환상의 뿌리가 궁금해졌는데, 원작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문예출판사, 2013)을 읽으면서 또 꼬리를 물게 되면 어떡하나. 마감이 더 늦어지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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