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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노승영의 책 속으로, 세상 속으로] 우주의 계절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0-06-01



우주의 계절


글_노승영(번역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 앤 드루얀, 사이언스북스, 2020

 

 얼마 전부터 작업실 앞 화단/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작년에 야심차게 심었다가 꽃이 수정도 하지 못한 채 다 떨어져버려 그냥 뽑아버릴까 하다가 불쌍해서 그대로 둔 채 물도 주고 비료도 준 딸기가 겨울을 나고 올해는 너덧 군데 줄기를 올려 하루에 빨간 열매를 두어 개씩 맺는다. 로빈 월 키머러의 향모를 땋으며(에이도스, 2020)에 소개된 세 자매 콩, 호박, 옥수수도 심었다. 콩이 질소 고정 작용으로 땅에 양분을 공급하고 호박이 땅을 덮어 잡초가 못 자라게 하고 옥수수가 콩 넝쿨의 지지대 역할을 한다는데, 콩이 재크와 콩나무 이야기에서처럼 쑥쑥 자라는 동안 옥수수는 생장이 더디기만 해서 걱정이다. 호박이야 작년에 땅을 뒤덮고도 모자라 화단/텃밭 밖까지 뻗어 나간 걸 보았기에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그러고 보니 작년에 무를 휘감아 부러뜨리던 박주가리가 올해는 하나도 안 보인다. 작년 아파트 화단에서 예초기에 잘려 나가기 직전에 구출하여 옮겨 심은 선괭이밥과 이웃에게 얻은 덩이괭이밥, 멋대로 화단/텃밭에 자리 잡은 미국제비꽃은 노란 꽃, 분홍 꽃, 파랑 꽃을 활짝 피웠고 작년에 씨앗을 받아 올해 땅에 뿌린 미국나팔꽃은 무사히 싹을 틔워 나비 모양 잎을 무럭무럭 키운다.

번역을 하다보면 시간관념이 여느 사람과 달라진다. 업무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으니 주말이나 휴일이 따로 없고 휴가 기간도 딱히 없어서 책 한 권을 시작하여 끝내는 주기를 언제까지나 되풀이할 뿐이다. 번역가에게 시간이란 2~3개월의 끝없는 반복으로 인식된다. 그런 식으로 10여 년을 지내다 화단/텃밭을 가꾸면서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봄이 되어도 밤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다가 순식간에 더위가 찾아오는 바람에 파종 시기를 맞추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내가 씨뿌리기를 하지 않았다면 기후 변화를 남의 일로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계절의 순환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계절의 순환의 순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인류는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을 자연의 이치로 알고 살아왔지만 이젠 봄이 과연 어김없이 돌아올지 조금씩 확신이 옅어진다. 그러다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를 집어들었다. 표지를 넘기니 우주의 일생 1382000만 년을 1년으로 환산한 우주력이 눈길을 끈다. 한 달은 10억 년을 조금 넘고 하루는 3765만 년, 1시간은 158만 년이다. 지구는 831일에야 형성되기 시작했고 지구의 생명은 92일에 생겨났으리라 추정된다. 태양은 언젠가 적색거성이 되어 지구를 집어삼키고 자신도 붕괴할 테지만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새로운 태양이 태어나고 있다. 은하조차 거대한 블랙홀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질 테지만 또 어디에선가는 새로운 은하가 탄생하고 있다. 그런데 우주 자체는? 우주의 달력은 1231일 자정에서 끝난다. 그 뒤로는 무한한 무.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을 읽으면서 생명 거주 가능 영역을 생각한다. 물이 있고 온도가 적당해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곳.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이 아니라 생명체가 살 수 있는 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화성도 지금으로부터 30~40억 년 전의 약 2억 년간은 생명 거주 가능 영역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생명이 탄생하여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지구도 언젠가는 생명 거주 가능 영역의 지위를 잃게 될 것이다.

책에서는 앞으로 10억 년에 걸쳐 인류가 새로운 보금자리로 삼을 만한 외계 행성을 찾아다니는 과정을 상상한다. 라피타 사람들이라고 알려진하지만 앤 드루얀은 항해자라고 부르는사람들이 약 1만 년 전에 망망대해를 건너 세상의 가장자리를 개척했다. 인류의 역사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여 보금자리로 삼는 과정이었다. 항해자의 후손인 지금의 인류도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개척할 수 있을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의 부인 앤 드루얀이 쓴 같은 제목의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식은 발전하고 정교해진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는 우주의 나이가 150~200억 년이었으나 이제는 1382000만 년으로 훨씬 정확해졌다. 2017915일에 토성 대기권에 진입하면서 수명을 다한 우주선 카시니 호가 1997년에 발사되었으니 (영어판이 1980년에 출간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는 카시니 호가 보여준 타이탄과 토성의 비밀을 알 도리가 없었다. 세계 최대의 망원경인 중국의 구경 500미터 구면 전파 망원경2016년에야 임무를 시작했다. 나는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를 읽으면서 과학사의 굵직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 중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한 빅토르 모리츠 골드슈미트, 뇌의 활동을 측정한 안젤로 모소, 카시니 호를 토성으로 날려 보낸 중력 도움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유리 콘드라튜크(본명은 알렉산드르 샤르게이)를 알게 된 것은 이 책 덕분이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는 냉전 시대 미소 양국의 핵무기 개발에 우려를 표한 반면에 앤 드루얀의 걱정거리는 기후 변화다. 그녀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지금 과학자들은 우리 인류가 자초한 대멸종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
이번 대멸종은 지구에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 벌어졌던 대멸종들과는 차원이
다른 재앙이리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생명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요소들, 이를테면 공기와 물과 환경과
같은 요소들을 돈만큼, 아니, 돈보다 더 아껴야 합니다. 이 세상이 깡그리 망가져
버린다면, 인공물에 불과한 돈 따위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화단/텃밭을 다시 둘러본다. 잎 사이로 손을 휘저어 다 익은 딸기를 딴다. 오늘은 여섯 개를 건졌다. 물을 주면서 몇 달 뒤에 수확하게 될 콩, 호박, 옥수수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심고 가꾸고 거두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도? 인류가 새로운 생명 거주 가능 영역을 찾아 개척하기까지 부디 계절의 순환이 멈추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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