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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승영의 책 속으로, 세상 속으로] 돌아올 쎄븐을 기다리며관리자2020-08-03




    돌아올 쎄븐을 기다리며


    글_노승영(번역가)


    러키 서른 세븐, 정새난슬(일러스트레이터), 한겨레, 2018

     

    다른 사람은 나와 다를까? 생활 에세이를 읽는 것은 이 물음의 답을 얻으려는 욕구 때문이다. 우리는 다름에 매혹되고 같음에 안도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남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옷차림, 말과 행동, 판단 같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뿐이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아닌 이상 우리가 남의 감정과 내밀한 속사정을 아는 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이른바 성격의 갑옷을 입은 채 상대방을 대하며 상대방도 그러리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생판 모르는 타인이 내 눈앞에서 갑옷을 벗을 때가 있다. 아직 친해지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친해질 가능성도 전혀 없는데. 에세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미화할 수 있다는 특권이 있다. 그래서 읽는 사람도 그런 사정을 감안하고 읽는다. 조금은 냉소하면서, 조금은 의심하면서. 그런데 자신의 부끄러운 (또는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속사정을 난데없이 드러내는 글이 있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인 우리의 몫이다. 그것은 저자의 눈앞에는 독자가 없지만 독자의 눈앞에는 (실물 못지않게 생생하게 묘사된) 저자가 있기 때문이다.

    갑옷에 덮이지 않은 맨살을 드러내는 것은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요, 자신을 약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자신이 강하게 만드는 때가 있다. 글과 노래엔 그런 힘이 있다. 내가 알기로 대중 앞에서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직업은 작가와 가수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취약하게 드러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게 공감하게 한다. 상대방이 갑옷을 벗으면 우리는 방패를 내린다. 냉소와 의심을 거두고 그의 진심을 경청한다. 이것은 비폭력의 저항이 힘을 발휘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자신을 솔직히 드러낸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스스로 갑옷을 벗는다. 저자의 맨몸을 곁눈질로 훔쳐보면서 자신의 맨몸과 비교한다. 친숙한 말로 하자면 자아 성찰이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번번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이를테면 예전에 아이들을 보던내 모습을.

     

    아이를 낳자 꿈은 그냥 꿈일 뿐임을 깨닫게 되었다. 일단 아이를 본다는 개념이 서로 달랐다. 여자에게 육아는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돌보면서 기저귀가 얼마나 남았나 체크하고 젖병을 씻어야 했다. 계절에 맞는 내의를 검색하고 유아 발달에 맞는 책 후기도 읽었다. ‘또 외식하면 나는 나쁜 아내일까자책도 해야 했고 우울함이 찾아오면 난 모성애 같은 거 없나봐눈물만 펑펑 쏟았다.

    반면 남자는 말 그대로 보았다’. 무엇을?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에게 육아란 그런 것이었다.(43~44)

     

    정말이지 나도 그랬다. 아내가 일이 생겨서 외출할 때마다 나는 호기롭게 애들은 내가 볼게. 걱정 말고 다녀와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애들을 봤다’. 집에서, 놀이터에서,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면서 애들을 보는 것은 내게 식은 죽 먹기였다. 식은 죽이라도 먹이는 것은 보다에 포함된 일이 아니었다. ‘보다를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세상이란 참 쉬운 거였다. 물론 밥을 해서 애들을 먹일 때도 있었지만, 그건 밥을 하다가 아니라 밥을 해주다였다. 아차, 그러고 보니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소개하는 걸 깜박했네. 러키 서른 쎄븐“33살에 펑크록 밴드 보컬과 결혼해 34살에 딸을 낳았고 35살에 이혼한”(저자 소개) 여자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위의 사례는 이혼 사유 #1이었던 것이다. 식은 땀이 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이혼 위기를 나도 모르게, 아슬아슬하게 넘겨온 것일까.

     

    그런가 하면 때로는 책에서 독자가 자신의 모습을 본다라는 말이 비유가 아닐 때도 있다.

     

    최근에 목격한 가장 강력한 패션은 발가락 신발이었다. 밑창이 거의 없는 신발은 발가락의 윤곽을 몽땅 드러내서 매우 기이해 보였다. 발가락 양말 위에 발가락 양말을 하나 더 신은 것처럼 보여서 생소했다. 울퉁불퉁한 지면을 느끼며 걸어 다니는 일은 신선한 체험일 것이다. 원초적인 감각을 일깨우며 건강도 챙기는, 통념을 뛰어넘은 선택. 견고한 뚝심이 돋보이는 패션은 내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기에 멋졌다.(197)

     

    단지 평발이어서였다. 일반 구두를 신으면 얼마 걷지 않아도 발바닥이 아팠다. 한때는 마사이 워킹이라는 것에 혹해서 밑창이 둥근 신발을 신고서 건들건들 서고 비틀비틀 걸었다. 인간의 발은 원래 맨발로 걷도록 만들어졌다는 말에 귀가 쫑긋했다. 하긴 20년도 더 전에 맨발로 다닌 적이 있었다. 다행히 압정은 한 번도 밟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발바닥이 새카매져서 남들 신발 벗을 때 나는 발을 씻어야 했다. 내 발바닥이 남들보다 말랑말랑하다는 걸 깨닫고서 며칠 만에 신발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 아무리 사회 규범을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안구의 방향과 시선이 머무르는 시간을 감지하는 능력은 있으니까. 남과 달라서 쉽게 섞여들지 못하고 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는 삶. 나는 그런 삶이 좀 버거웠는데,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시선을 오히려 즐기는 것 같았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2016715일 금요일 저녁이었다. 첫 동인지를 내기 전에 해체된 동인지 첫 모임에서였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그녀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진한 화장, 까무잡잡한 피부를 더 까맣게 덮은 문신들, 그리고 어깨를 드러낸 검은색 드레스. 어쩌면 이 드레스였을까?

     

    혼자여서 편하다고 콧노래 부르던 날의 블랙 폴리에스터 씨는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애인이었다. 지하철 승강장에 부는 바람을 핑계 삼아 내 온몸을 꽉 안아주었다. 숨길 것을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언제든, 어디서든, 어떻게든속삭이며 내 몸에 달라붙었다. 나를 음란하고도 유쾌한 모습의 여자로 만들어주었다. 전신거울 속의 나는 용감해 보였다. 모르는 사람 모두를 안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멋져요칭찬했다. 나는 블랙 폴리에스터 씨의 모든 것을 더 사랑하고 싶었다.(29)

     

    하지만 몇 차례의 동인지 모임 이후로 교류가 끊긴 그녀는 내게 딸과 고양이와 자수를 좋아하던 사람으로만 남아 있다. 강렬한 외모는 두 번째 모임에서 이미 친숙해져서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한 화장과, 까무잡잡한 피부를 더 까맣게 덮은 문신들과, 어깨를 드러낸 검은색 드레스 속에는 의외의 모습이 숨어 있었고, 그녀는 이 책에서 그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의외로 소심하다.”

    솔직하지만 방어적이다.”

    인맥이 좁고 활동도 제한적이다.”

     

    지인들은 내 성격을 읊으며 의아해한다.

     

    넌 처음엔 센 캐릭터 같은데 알고 보면 겁도 많고, 부끄러워하고물론 실망하진 않았지만(실망했다).”(183)

     

    그런데 진짜 센 캐릭터란 세지 않은 진짜 모습을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사람 아닐까? 이 책에는 독자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는 에피소드민망한 어떤 욕구 해소 도구, 민망한 어떤 생리 현상, 민망한 어떤 교제 앱에 대한 이야기들와 나 같으면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생각과 감정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알기도 전에 교류가 끊어졌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은 그녀를 속속들이 알아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물론 기분 탓이겠지. 인기 가수를 (일방적으로) 잘 아는 팬이 그 가수에게 느끼는 친밀함이 이런 느낌이려나. 내밀한 속사정을 내게 시시콜콜 들려준 가상 저자정새난슬 덕분에 나의 부끄러운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조금 부끄러워하고, 조금 괴로워하고, 그리고 잊을 수 있었다.

    책의 제목인 러키 서른 쎄븐행운의 37’, 그러니까 행운을 가져다주는 세 개의 7’, 말하자면 슬롯머신에서 잭팟을 터뜨리는 ‘777’…… 리는 없고, 서른일곱이라는 저자의 나이를 일컫는다. 이 책의 출간 연도가 2018년이니까 2028년이 되면 그녀는 마흔 쎄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 그녀의 마흔 쎄븐해피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길.

     

    후기.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증정본이다. 아쉽게도 사인은 없다. 홍보용으로 출판사에서 일괄 발송하는 증정본 중 하나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와 번역가 박산호 씨가 공저한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세종서적, 2018)이 출간되었다. 나는 답례로 내 책을, 당연히 정성 들여 사인 하고 근사한 문구를 적어서 보냈다. 정새난슬 씨는 장문의 소감문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저자로서는 결코 하지 말아야 할 망언(?)까지 서슴지 않았다(“나는 번역가 모모씨의 일일이 내 책보다 더 유익하고, 즐겁고, 지적이기에 페친 분들께 내 책을 사지 말고 노승영, 박산호 번역가의 책을 사길 권하고 싶다”). 그래서 나도 러키 서른 쎄븐의 소감문을 쓰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동안 내게 서평을 의뢰하는 곳이 없어서(T_T) 2년 뒤에야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밤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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