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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승영의 책 속으로, 세상 속으로] 납량의 밤관리자2020-09-07




    납량의 밤


    글_노승영(번역가)


    스티븐 킹 걸작선 05―스티븐 킹 단편집,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03


     

    821() 8, 일산 모처의 허름한 작업실. 사위가 어둑어둑하고 실내는 585~613nm 파장의 모기 퇴치 조명으로 불그죽죽하다. A4 용지에 출력한 프란시스코 고야의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이른 저녁부터 맥주를 홀짝거리다 살짝 술기운이 올라온 두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할 때가 됐다.

    납량納涼서늘함을 거둬들이다. 지루한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뒤이어 찾아온 무더위. 에어컨으로도 식히지 못하는 2프로를 책임질 공포 소설을 고르느라 일주일 전부터 에드거 앨런 포의 더 레이븐: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알에이치코리아, 2012)와 스티븐 킹의 스티븐 킹 걸작선 05스티븐 킹 단편집(황금가지, 2015)을 탐독했다. 포의 작품 중에서는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룸메를 죽이고 싶어도시 괴담의 원조 격인 윌리엄 윌슨, 주인공과 독자의 가슴을 시시각각 죄어드는 함정과 진자가 제격일 것 같았으나,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인지 시대가 바뀐 탓인지 소설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내게 섬뜩한 공포를 자아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후대의 모든 공포 소설은 포에게 빚진 바 크다.) 스티븐 킹의 작품 중에서는 쥐를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지옥의 공포를 맛보게 할 철야 근무, 자신에게 잠재해 있을지도 모르는 살인 충동을 돌아보게 하는 딸기봄, 최고의 연인에게 숨겨진 이면을 폭로하는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등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을 고르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남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서비스일까, 폭력일까? 무서운 이야기는 놀이공원의 청룡열차 같은 것일까, 짓궂은 장난 같은 것일까?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상대방이면 서비스요, 화자 자신이면 폭력이라고 볼 수 있으려나. 나를 가장 두렵게 한, 아니 소름 끼치게 한 작품은 가끔 그들이 돌아온다였다. 어린 시절에 당한 폭력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 공포 소설은 내가 실제로 무서워하는 무언가를 소환할 때 가장 효과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읽는 사람만 무서운 소설을 낭독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번만큼은 진정성보다 효과가 더 중요하니까.

    내가 고른 소설은 1969년에 코로나 사태를 예견한 밤의 파도였다(메인 대학교 문예지 유브리스에 처음 실렸다). 홍콩독감의 변이형인 A6가 창궐하여 인류가 전멸하고 지구상에 여섯 명만 남은 어느 해변.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쫄깃거리게 하는 공포가 아니라 스산함, 쓸쓸함, 지독한 우울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 나의 낭독이 끝나고 Y는 김미월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아시아, 2014)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종말에 대한 상상력도 진화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소설 속의 종말이 결코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기에 두려웠다면 요즘 소설 속의 종말은 조만간 일어나고야 말 일이기에 두려운 것 아닐까.

    H는 전건우의 한밤중에 나 홀로(북오션, 2019)에 실린 검은 여자를 낭독했다. 그야말로 어릴 적 교회 수련회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듣던 이야기였다. 작중의 비명 소리를 실제 비명 소리로 표현한 그녀의 얼굴에는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다행히 작품의 분량이 많아서 중간까지만 들었기에 겁에 질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낭독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납량의 밤은 시대착오적인 아이디어였을까? 하루하루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또 다른 공포가 필요할까? 우리가 과거에 공포 소설을 읽으며 두려워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일상이 안전했기 때문 아닐까. 어쩌면 이 시대의 공포 소설에 요구되는 역할은 예전과 사뭇 다른 것 아닐까? 이를테면 조만간 닥칠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든지.

    현실에서의 두려움을 가라앉힐수 있는 공포 소설은 어떨까?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코로나 백신처럼, 실제로 닥칠 종말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게 정신의 면역력을 키워주는 소설을 쓸 순 없을까. 잠에서 깨면 벗어날 수 있는 악몽은 얼마나 고마운가. 현실에서 깨어나 꿈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위가 완전히 물러나기 전에 제2회 납량의 밤을 개최하고 싶다. 이번에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판타지로만. 현실을 꿈으로 여길 수 있게 해주는. 필요하다면 알코올의 도움을 받아서. 사실 21일 행사의 정식 제목은 납량알코올의 밤이다. H가 가져온 샐러드와 보리과자와 복숭아를 안주 삼아 우리는 Y가 가져온 각종 맥주를 마셨다(‘납량알코올이 붙은 것은 Y의 의견이었다). 작은애에게 전화를 받고서야 이미 자정이 가까워진 것을 알았다. 다섯 시간 반이 이렇게 금세 지나가다니.

    현실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가 지금보다 더 무망한 적이 있었던가.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이 아니라 내일은 오늘보다 나빠질 거야라는 절망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까. 이제 행복이란 환상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사치가 되어버린 것 아닐까. 구원은 판타지에서 찾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소설, 게임, 마약, 알코올…… 생의 의지에 충만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맞는 죽음이 황망한 것처럼 희망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맞는 파국도 황망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현실을 직시하고 헛된 희망을 버리고 다 같이 매트릭스의 세계로!

    물론 그럴 수는 없다. 납량알코올의 밤은 1130분에 파했고 우리는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한 채 여전히 널브러져 있다. 현실에서 도피하게 하는 것은 판타지의 역할 중 앞의 절반이다. 뒤의 절반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예전과 달라진 채로.

    시계는 350분에 멈추었다. 밖은 아직 깜깜했고 파도가 세게 쳤다. 높아진 바다. 415분으로 하자. 머잖아 새벽. 침대를 빠져나와 현관으로 갔다. 더운 몸에 부딪히는 바닷바람이 좋았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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