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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승영의 책 속으로, 세상 속으로] 양말을 제자리에 벗어두지 않는 대통령관리자2020-10-06





    양말을 제자리에 벗어두지 않는 대통령


    글_노승영(번역가)


    『비커밍』, 미셸 오바마, 웅진지식하우스, 2018

     

    아래 예문에서 OO는 누구일까요?(주관식)

     

    오랜 뒤에 나는 수잰처럼 물건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아두는 남자, 옷을 개키지 않는 데 대해 가책을 전혀,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느끼지 않는 남자와 사랑에 빠질 터였다.(117) / OO은 이지적이었다. 어쩌면 너무 이지적이라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이 표현은 내 친구가 실제로 OO에 대해서 했던 말이다). 그는 술집에서의 사교에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었다.(142) / 그는 부유함을 썩 편하게 느끼지 못했다. 나처럼 그도 부유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고, 그러기를 갈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부자가 되기보다는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고, 그 방법을 아직 궁리하는 중이었다.(148) / 어쩌면 그가 돈을 한 푼도 못 벌지 모른다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167) / OO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방해받지 않고 혼자 책을 읽고 쓸 수 있는 폐쇄된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다.(243) / 직장에서 OO이라는 잘나가는 변호사를 만났고, 현실감각과 세상에 대한 비전으로 내 마음을 빼앗은 그 남자는 오늘 아침에도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두었고 가끔 코도 곤다고, 나는 병원에서 일하고 있고, 우리 어머니가 그날도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리고 와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316) / 내가 아는 한, OO은 쇼핑이나 요리나 집을 보수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지하실에 공구를 갖춰두는 타입이 아니었고, 리소토를 만들거나 울타리를 다듬으면서 업무 스트레스를 날리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집안일에 관한 의무와 걱정을 몽땅 떨칠 수 있는 것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덕분에 그의 두뇌가 구속받지 않고 더 큰 문제를 자유롭게 고민할 수 있을 테니까.(405)

     

    (어딘지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결혼 전에 사주 카페에서 궁합을 본 적이 있는데, 점쟁이가 나보고 백수 사주라고 그랬지. 내 너저분한 행색을 보고서 멀쩡한 직업을 갖긴 틀려먹었으리라 넘겨짚은 건지도 모르지만. 내가 썩 이지적이진 않아도, 술집에서의 사교에 어울리지 않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 게다가 굴! 내게도 혼자 틀어박힐 굴이 필요해.
    그리고 부자가 되기보다는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니, 근사하지 않아?)

    나와, 또는 당신과 비슷한 OO의 이름은 버락이다. 그래, 미합중국 제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 그런데 나는 왜 대통령이 못 됐느냐고? 그건 …… 미셸을 만나지 못해서일까? 언감생심. 남부럽잖은 선남선녀가 모진 역경을 디디고 시련을 극복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클리셰의 전형적인 사례다. 비커밍을 책꽂이 한가운데 꽂아두고도 한동안 비닐을 뜯지 않은 것은 여자애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자존감을 고취하는 흔하디흔한 자기 계발서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막상 표지를 들춰 이 책의 정체가 자서전임을 알고서도, 저자가 자신과 남편을 미화하느라 사실을 교묘하게 뒤틀었겠거니 생각했다. 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 2014)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대다수 회고록은 뻔한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다. 아무 회고록이나 들어 펼쳐 보라.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뚜렷한 이야기 문법에 맞추어져 있으며 문제 구조와 착한 사람 대 나쁜 놈 역학 관계를 갖추었을 것이다. 극적 구조는 미심쩍을 정도로 친숙하며 추락과 상승의 이야기는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투적이다. 회고록 작가에게는 극적이고 감동적인 놀라운 사건이 놀랍도록 자주 일어난다. 회고록 작가는 어린 시절의 장면과 대화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세히 기억한다.(197)

     

    물론 비커밍을 읽고 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게 딸이 있었다면 이건 꼭 읽어야 해, 라며 손에 쥐어주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서평을 쓰기 위해 온갖 미사와 여구를 동원하느라 머리를 쥐어짜고 있지만 미셸 오바마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삶 자체가 자서전적이었으니까.
    복제로서의 클리셰는 초라하지만 원본으로서의 클리셰는 압도적인 법 아니던가.

    일전에 고소득 직장을 버리고 남을 돕는 일에 직접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는데,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없다면 계속 고소득 직종에 종사하면서 기부를 많이 하는 편이 낫다라는 윌리엄 맥어스킬(냉정한 이타주의자, 부키, 2017, 240)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는데, 흑인 하층민 출신으로 프린스턴 대학교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시카고의 일류 법무 법인 시들리 앤드 오스틴에 취직했다가 변호사 일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여 시청과 비영리 단체 등으로 전직하여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미셸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물론 미셸의 전문성은 기업을 상대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 조직을 꾸리고 멘토링을 하는 쪽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미셸의 삶만 해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한데, 버락은 한술 더 떠서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부와 명예를 걷어차고 사회 운동과 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손대는 일마다 승승장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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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에 출간될 예정인 버락의 회고록은 자서전으로서는 함량 미달일 것이다. 버락만 한 두뇌도 매력도 열정도 가지지 못한 우리에게는 좌절만 선사할 테니까.

    비커밍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부분은 오바마 대통령 내외의 공적 삶에 가려진 부부 사이의 차이와 갈등이었다. 맨 위 예문에서 보듯 버락은 집안일에는 관심도 책임감도 없었다. 가정을 소홀히 하는 버락 때문에 부부는 결혼 초에 상담까지 받게 되는데, 그 뒤로도 버락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옷 개기를 싫어하고 양말을 아무 데나 벗어두는 것이 대통령으로서의 결격 사유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불 개기, 청소, 요리, 설거지, 빨래, 장보기를 비롯한 남편의 의무는 누구도 면제받을 수 없어! …… 혹시 여러분도 지금 내가 생트집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하지만 집안일을 분담하자는 여성의 목소리도 그런 식으로 무시당하지 않았던가. 어쨌거나 대통령이 되어서 경제를 살리고 불평등을 줄이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정작 궁금한 것은 버락이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서도 미셸에게 여전히 사랑받는 비결이 무엇인가다.

    물론 버락의 이런 단점들은 미셸이 이 책에서 버락을 미화하고 있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하려는 전략적 장치일지도 모른다. 버락을 옥으로 만들기 위한 티라고나 할까. 하지만 뉴욕 타임스칼럼니스트가 내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버락이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버터를 냉장고에 도로 집어넣지 않을 때가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것은 그를 깔아뭉개는 짓이라고 주장한”(323) 것을 보면, 저 전략은 적어도 실패한 전략이다. 따라서 미셸은 버락이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정말로 속상해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런 생트집을 잡고 있는 것은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는 흠잡을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미셸과 버락의 삶은 완벽하다. 시련을 겪지도,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아서 완벽한 게 아니라 영웅 서사의 공식에 더없이 부합한다는 점에서 완벽하다. 저런 삶은 재현될 수 있을까? 재현될 수 없는 삶이 본보기가 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완벽한 또 한 가지는 번역이다. 얄밉도록 매끄럽고 적확해서 오타라도 찾아보려고 눈에 불을 켰지만 보조사 으로 잘못 쓴 것 하나,
    격조사 로 잘못 쓴 것 하나, 이렇게 두 개밖에 못 찾겠다. 이 근사한 책을 앞에 놓고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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