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열기
닫기
이전으로 돌아가기

독서인

메뉴타이틀

게시물 상세화면
제목 [마음을 읽는 여자 박상미의 책읽기]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7-10-10
조회수 157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연극인 이병복 구술 채록-


 
 


 

   이병복(1927~)선생을 빼면 한국 공연예술사를 설명할 길이 없다. 한국에서 무대미술을 독립적인 예술장르로 인식하게 만든 선구자 이병복. 이병복 선생을 만나게 된 건 여성 생애사 <우리가 이래서 사는가 보다 - 연극인 이병복>(청강문화산업대학교 출판부)을 읽은 덕분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고비를 한 여성이 온몸으로 관통하면서 한국 연극사에 깊은 족적을 남기는 과정을 읽고, 가슴이 벅찼다.

   1948<여인 소극장>의 창단 멤버로 연극인의 삶을 시작 한 이병복 선생. 1966년에 극단 <자유>를 창단한 이후 2006년까지 40년 가까이 극단의 대표를 맡았으며, 소극장 운동, 살롱 드라마의 효시였던 까페 떼아뜨르(1968~1975)를 운영했다. 한국무대미술가협회를 만들고 회장을 맡은 동안 극단을 이끌고 해외 공연을 수 없이 다니며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보다 해외의 안목이 무대미술가 이병복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프라하 세계무대미술경연대회에선 1991년부터 2003년까지 매회 한국이 수상하는 성과를 이뤘다. 그가 만든 한지로 만든 의상은 한국 전동 의상 디자인에 전통의 색을 입힌 독특한 무대 의상을 창작해서 무대미술의 격을 높이는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

   뒷광대 이병복이 창조한 무대에는 동양적 미학이, 광대의 영혼이 서려 있다. 그는 한지, 광목, 삼베 등을 가지고 무대를 꾸민다. 한국의 전통미가 현대의 무대와 만나 독창적 무대미술을 창조해 해외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생의 무대를 보고 감탄한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땐 그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했기에 절반의 감동밖에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 뒤늦게 아쉬웠다.

   한국 역사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자신이 꿈꾸는 삶을 성실하게 창조적으로 살아낸 여성을 찾기 힘들다. 질문을 통해 기록을 더 남기고,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이병복 선생의 삶을 공유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여성은 교육을 받는 것조차 힘들던 시대에 한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로서 평생을 걸어온 어른의 손을 잡은 순간, 가장 경건한 자세로 앉아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 적고 싶었다. 상대를 깊숙이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하고도 맑은 기운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굴곡진 인생 고비를 넘을 때마다 그가 흘렸을 눈물의 온도가 느껴졌다.

 

   “세상 모든 일은 배우면 다 쓸 데가 있다. 어려운 시대를 견디고 살아온 거, 호강하고 살다가 6·25 때 아버지 납치되고 난 뒤에 집구석이 쑥밭이 됐잖아. 그래도 난 죽어도 동생들 공부시키고 싶었거든. 그러니까 열심히 뛸 수밖에. 그런데 뛴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삶이라는 게. 나 맡은 일이 무슨 일이든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덤벼야 해. 내가 무대미술을 어디 가서 배울 데가 있었어? 스승이 있어? 대표니까 막은 올려야 되지, 발등에 불은 떨어졌는데 사람은 없지, 의논할 데도 없지, 어쩔 거야? 그래서 북도 치고 나팔도 불다 보니까 그 세월이 다 갔어(웃음). 미친 것처럼 정성을 쏟아야 무엇이든 된다....”

 

   선생의 어머니는 식솔들을 먹여 살리려면 집안 살림을 세세히 알아야 한다며 아침마다 빗자루를 휘두르며 살림을 배우라고 호통을 치셨다. 안 그러면 시집가서 쫓겨난다고내가 할 줄 알아야 남도 부린다고 강조하셨다. 어머니가 고된 시집살이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선생은 집안의 장녀로서 큰집 살림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큰살림을 배우고 나니 사회에서 만난 일들은 무서울 게 없었다. 극단 일을 도맡아 뒷광대로 살면서 무대의상, 무대미술 등을 혼자 다 떠맡아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다. 남자도 하지 못할 큰일도 겁 없이 다 해낼 수 있었다. 무대의상, 의상실 사업 등 한국인이 시도하지 못한 분야에 도전하고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집안 어른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와 교육 덕분이었다. 동경미술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집안 반대로 이화여전에 입학했다.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건 할머니가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한 덕분에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남편 권옥연 화백을 한국의 피카소로 만들겠다는 야무진 꿈은 가난도 꺾지 못했다. 남매를 시어머니께 맡기고 1957,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연극 공부나 의상 공부는 꿈도 못 꾸고, 권 화백을 내조하는 데 집중했다. 학생 신분을 유지해야 혜택이 많았기에 소르본대학에서 불어 교수학을 공부하고, 조각 아틀리에에서 조각 연수를 받았다. 아내의 노력으로 권화백은 살롱드메, 리알리떼 누벨에 초대 작가로 전시회 출품을 하게 된다. 유학시절 4년 내내 자기계발 보다는 권화백의 뒷바라지에 더 열심히였다. 하지만 양재학교를 다니는 6개월 동안 이병복의 타고난 손재주는 프랑스인들을 놀라게 했다.

   살롱드메, 레알리테 누빌 등 유명한 전시회 심사위원인 자보 선생이 이병복에게 충고를 했다. ‘병복은 한심하다. 예술적 재능은 남편보다 많은데 살림만 사느냐? 남편 제치고 너도 해라. 제대로!’ 그때야 선생은 깨달았다.

 

꼬불꼬불 돌아가도 그게 다 운명이야....”

 

   극단 <자유>를 이끌고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연극과 한국의 독특한 무대미술을 알리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았다. 1997년에는 세계미술가협회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고, 금곡 무의자 박물관에서 축하무대로 펼친 야외공연 <왕자 호동>은 한국 연극사의 큰 사건으로 불린다. 이병복, 권옥연 화백이 함께 지은 무의자 박물관에서는 2006년에 기획전 <이병복, 없다>가 열렸다. 작품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이병복으로부터 작품들 또한 자유로워지라고 이별의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항상 뒤에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존재가 되는 사람이 있다. 남편의 뒤에, 배우의 뒤에서 보내는 삶을 택하고 이병복, 없다고 말해왔지만, 그럴수록 세상은 그의 가치를 인정했다. 남편을 피카소로 만들기 위해 프랑스로 떠나고, 그를 키운 건 이병복이었다. 그러나 이병복의 가슴엔 언제나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다. 때문에 끊임없이 재능을 키우고 간절한 에너지를 쏟아서 남이 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창작해 낼 수 있었다. 지금도 이병복의 작업실에서는 새로운 작품이 태어나고 있다. 100년 인생을 눈앞에 둔 예술가의 삶은, 아픔도 기쁨도 모두 작품이 된다.


   영원히 있다, 대한민국 연극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이병복은.


 
이전글
[소설가 이근미의 책세상] 혼자 살면서 발휘하는 힘, 고독한 사람들의 사회학
다음글
[소설가 장마리의 독서지략] 감성의 계절, 누가 또 시인이 되려고 하는가?
0 / 100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