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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음을 읽는 여자 박상미와 책읽기] 나만의 비밀을 만드는 여행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8-01-08
조회수 208
나만의 비밀을 만드는 여행

글_박상미(교수)
 




▲ 『섬』/장 그리니에 지음/민음사/2008
 

 

삶은, 길 위에서 만난 우연한 인연을 통해 답을 주기도 하고, 지름길을 알려주기도 한다. 여행을 하다보면 나와 멀어질수록 내가 보인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 <섬>을 읽다가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 때, 내가 느꼈던 낯선 도시의 바람 냄새, 그 곳에서 만든 나의 비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누구나 여행을 꿈꾼다. 여행이라는 단어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건, 내가 경험한 여행의 추억을 호출하여 단시간에 나를 그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나만의 ‘비밀’을 창조하는 여행의 다른 이름은 ‘설레임’이었다.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만난 내가 몰랐던 ‘나’와 걸으면서 찾은 답을 통해서 내일을 사는 힘을 얻는 게 여행이 아닐까.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짤막한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 두자...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그리도 가냘프게 그리도 인간적으로 보호해 주는 마른 돌담 하나만으로도 나를 격리시켜 주기에 족할 것이고, 어느 농가의 문턱에 선 두그루의 시프레 나무만으로도 나를 반겨 주기에 족할 것이니... ”

 

서른 여섯, 인생을 다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뮌헨으로 떠난 것도, 모르는 얼굴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르니에가 말 한 “비밀스러운 삶. 고독한 삶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삶”은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내가 만든 ‘섬’에 머물며 나 자신과 대화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리라.

 

또 다른 나를 만나서 답을 찾기도 하는 것이 여행이다.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안고 혼자 떠났던 여행길에서 만난 인연들에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꺼내 놓기도 하고, 누가 답을 주지 않아도 내 속에서 답이 떠오르기도 한다. 누구도 먼저 이름을 묻지 않고, 끝내 아무도 묻지 않는 인연을 여행길에서 만나기도 한다. 얼굴도 희미하게 잊혀져가지만, 헤어질 때 굳게 잡았던 손의 온기는 여전히 기억난다. 잘 살자고, 잘 살아내자고... 그날 했던 약속, 잘 지키고 있는지 가끔 안부를 묻고 싶은 밤도 있다.

 

장 그르니에가 여행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되찾는 여정을 함께 하면서, 나 자신을 만나고 스스로 묻고 대답하다보면 알베르 카뮈가 이 책에 쓴 서문이 담고 있는 설레임을 이해하게 된다. 까뮈는 스무 살 때, 알제에서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고 한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견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읽고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생을 사는데 위대한 계시를 주는 책’이라고 극찬한 까뮈는 이 책을 통해서 스스로 찾은 답들이 생을 사는데 위대한 계시가 되었을 것이므로, 그런 계시를 찾아낼 수많은 젊은이들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럽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아름다운 여행 추억을 만들기를 원하고, 살면서 내가 읽기 위한 여행기 한 편을 완성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르니에의 말을 빌리자면, ‘낯선 도시에서 비밀스러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내 꿈 이야기’가 나만이 쓸 수 있는 여행기가 되는 것이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 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모르는 얼굴과 언어 사이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머리를 나부끼며 혼자 걸을 때, 인생은 문득 달의 반대편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른여섯에 내가 도착한 뮌헨에서 <섬>에서 만난 그르니에의 문장들을 몸으로 만났다.

 

2012년, 5월 30일. 오후 6시. 독일 뮌헨 공항.

짐 찾는 곳(Baggage Claim Area)에 동양 여자 하나가 얼굴이 노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천천히 도는 레일 앞에 느긋하게 서 있던 여자는, 레일이 돌고 도는 동안 얼굴에 점점 불안이 짙어지더니 서너 개의 가방만 레일 위에 남게 된 순간, 드디어 울상이 되었다. 공항 직원들을 붙들고 여자가 말했다.

“내 트렁크가 없어졌어요!”

한국에 비해 일처리가 느려터진 독일답게 ‘걱정 마, 기다려.’ 같은 말만 반복하던 금발의 50대 남자 직원은, 몇 통의 통화를 끝내고 여자에게 다가가서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가방은 지금 프랑크푸르트나 인천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뮌헨으로 가방이 다시 오는 데는 하루, 인천에서는 길면 한 달이 걸릴 수도 있는데,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어요. 우선 집으로 돌아가 있으면 내일 전화로…”

여자는 ‘꿈일 테지… 이게 현실일 리가 있나?’ 하는 표정으로 금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Sorge dich nicht(걱정하지 마세요)” 별 일 아니라는 듯 느긋한 표정으로 남자가 건네 준 비행용 1회용세면 도구세트 2개를 손에 들고 서 있던 여자는,

“지금 100유로 밖에 없다고요! 옷과 책, 한국에서 가져 온 전부를 잃었다고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모든 걸 잃었다는 공포 속에서 무인도에 갇힌 심정이 되었을 때, <섬>에서 만난 그르니에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보았으면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걸 잃은 그 섬에서, 생은 내게 처음 달의 뒷면을 보여주었다. 오늘 처음으로 <섬>을 열어보게 될 낯모르는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하며, 새해 첫 책으로 다시 <섬>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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