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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명자의 엉뚱한 고전읽기] 관조할 때 행복하다고?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8-12-03
조회수 24


관조할 때 행복하다고?


글_명로진(작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저/홍석영 역 | 풀빛 | 2005년 09월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주는 행복론이다. 쉽지 않은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해지려면 미덕을 갖추고, 용기를 가지며, 절제하고, 돈을 중요하게 여기되 관대해야 하며, 너무 지나치게 화를 내서도 안 되고 너무 화를 내지 않아서도 안 된다. 그리고 진실하고 재치 있고 적당히 사교적이면서 실천적인 지혜와 분별력, 판단력을 갖고 심사숙고 하면서 우애를 갖추고 늘 배우는 마음으로 관조적인 삶을 살면 된다. 참 쉽지?”

글쓰기 수업에서 내가 늘 하는 말이 있다. “하나만 이야기 할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살면 행복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썼지만 정작 니코마코스는 불행했을 것 같다. 너무 많은 것을 원하는 아버지를 가졌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해지는 방법 수십 가지를 나열하면서 불행해지는 경우의 수는 다음과 같이 한정한다.

 

얼굴이 아주 못생겼거나 가난한 집에 태어났거나 외롭고 자식이 없는 사람은 행복해 지기 쉽지 않다. 또한 아주 못된 자식이나 친구를 가진 사람, 좋은 자녀나 친구와 헤어진 사람도 행복해지기 쉽지 않다. (18)

예나 지금이나 부사副詞가 중요하다. 얼굴이 아주못생겼거나 아주못된 자식이나 친구를 가진 사람은 불행하다. 그런데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은 그냥 불행하다. 원문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해도 행복해지기 쉽지 않다.’ 우리는 행복을 결정하는 비율의 상당량을 이미 타인의 결정에 맡긴 채 태어난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남들처럼 행복해 지려면 마흔이 될 때까지 지독한 짠돌이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마흔이 되면 불혹이 되지 않으려 해도 불혹이 된다. ‘에 해당하는 아이템에 대해 무지하거나 둔감한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자신의 삶 전체에 걸쳐 완전한 덕을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얻게 되는 것”(19)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은 원문이 아레테ρετή 인데 탁월함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그 사람은 아레테가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은 자기가 맡은 일에 탁월하다.”라는 뜻과 함께 그 사람은 미덕이 있다.”란 의미였다. 따라서 이런 말은 없었다.

 

그 가수는 노래는 못해도 사람은 괜찮아.”

그 배우는 발연기를 하지만 덕이 있어.”

그 정치인은 정치는 못해도 인기는 많아.”

 

이런 건 한 마디로 미덕이 없는 거다. 일단 제가 할 일을 잘하고 봐야 하는 거다. 인정받고 안 받고 와는 상관없다. 잘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 과정 속에 행복이 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해지려면 습관이 중요하다고 했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 왔다고 봄이 오는 것이 아니듯, 또한 하루아침에 여름이 되는 것이 아니듯 인간이 참으로 행복해지는 것도 하루나 이틀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17)

 

목표한 대학에 입학했다고,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원하던 상대와 결혼했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선생에 의하면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어떤 시기에, 어떤 특정한 일을 잘 했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법은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행복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또 중용이야말로 우리의 행복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중용은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民鮮久矣

자왈 중용지위덕야 기지의호 민선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용이 이루는 덕이 참 지극하구나! 중용을 오래 실천하는 사람이 드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렇게 받는다. “미덕이야말로 중간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중용은 미덕의 특징이다...중용은 어떤 의미에서 최상이다” (천병희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76~78) 중용이 중간이지만 최상이라는 뜻이다. 공자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왜 중간이 최상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의 중앙을 찾는 것을 예로 든다. 원의 정중앙을 찾아낸다는 것은 대충해서는 안 된다. 원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중용도 극단이자 중간이자 최선이다. 중용은 하루나 이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최선의 도를 지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이성에 따르는 관조적 활동을 할 때 행복할 수 있다. 관조를 많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더 행복해 진다...행복은 어떤 형태의 순수한 관조라고 할 수 있다.”(157)

 

천병희 선생은 관조적인 삶이 가장 행복하다.”(399)라고 번역했다. 이런 대목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어렵게 만든다. ‘관조의 뜻을 풀거나 이 책의 그리스어 원문을 파헤칠 생각은 없다. 그 방법은 해석을 더 꼬이게 만들 뿐이다. 다만 인간의 모든 활동 가운데 신의 활동과 가장 많이 닮은 것이 바로 관조라는 문장은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 땅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기아가 여전하고, 홍수와 화재가 빈번하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살다가 병들고 죽는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미워한다. 신은...이 모든 것을 관조할 뿐이다. 그리스 신들 역시 사랑하고 미워했으나 그들은 병들거나 죽지 않았다. 관조의 삶을 살았다.

한 마디로 한국 시리즈 경기를 느긋하게 경기장에서 관전할 뿐이지, 직접 경기장에서 뛰진 않는 셈이다.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승패를 떠나서 100%의 격정을 맛본다. 이 경정은 그들의 생존과 관계있다. 경기를 잘 치른 선수는 내년 연봉이 높아지고 망친 선수는 쫓겨날 지도 모른다. 너무 위험하다.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관객들은 50%의 격정을 누린다. 누가 이기고 지든 관객의 이익과 상관없고 생존과는 더더욱 무관하다. 삶 속에서 이익이나 생존과 관계없는 무언가를 누릴 때, 우리는 행복하다. 설사 그것이 내 탁월함을 드러내는 고유의 천직이라 해도 이익이나 생존과는 전혀 무관한 듯 다룰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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