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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마의 변경에서 책 읽기] 삶으로 나가는 '두 번째 앎', 그 묵묵한 통찰관리자2021-09-27


    삶으로 나가는 '두 번째 앎', 그 묵묵한 통찰

    글_조형근(사회학자)

     


     

    「묵묵」, 고병권 저, 돌베개, 2018
     

    유력 대통령 후보 중 한 명이 인문학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며 한동안 시끄러웠다. 인문학은 공학, 자연과학을 열심히 하면서 병행해도 되는 공부라며, 그렇게 많이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양식 있는 보통사람들, 무엇보다 인문학 하는 사람들이 분노했음은 물론이다. 저 인식의 천박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오만 가지 이유를 들어 인문학 공부의 독자적(!) 필요성을 논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저열한 인식과는 별개로 이런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공학이나 자연과학에는 쓸모가 분명하다. 인문학의 쓸모는 무엇인가? 인문학은 우리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나아가 안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장애인 배움터 노들야학의 철학교사인 고병권의 에세이 묵묵은 인문학이, 나아가 앎이 우리 삶을 구원할 수 있는지 묻는 책이다. 그 물음에 대해 배우고 고민하며 실천해온 여정을 담았다. 두껍지 않되 묵직하다. 노들야학이 펴내는 잡지 노들바람경향신문에 연재했던 글들을 다시 묶었다. 묶은 글이라고 들쑥날쑥하지 않고,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쓴 것처럼 일관되다. 그의 앎과 삶이 오롯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문의 칼럼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서 묵묵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묵묵하다고 할 때의 그 묵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소리는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다. 말하자면 이 책은 고통의 소리를 듣는 이야기다. 이미 들리지만 들으려 하지 않는 우리 의지에 대한 성찰이다. 앎이 삶을 구원할 수 있으려면 이미 들리던 것을 다시 들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무엇보다 어두운 자기의 내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지만 괜찮다. 용기의 대가가 꽤나 가치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등장생명들을 살펴보자. 이동권을 요구하며 철로에 자신을 묶은 장애인, 장애를 배제하는 세상을 향해 음독자살한 장애인, 자신은 자유롭다고 말하면서 명단 순서대로 줄서서 간식을 배급받는 요양시설의 장애인, 농성 4,000일째의 해고 노동자, 대학에서 지원해주는 해외여행을 가면 수급권이 박탈될까 걱정하는 기초생활수급자 대학생, 예비검속으로 수용소에 갇혀 수십 년을 학대받은 이제는 중년이 된 지난 날의 소년, 이방인은 곧잘 적으로 여기는 나라에 와서 심사를 기다리는 난민, 떠나간 가족을 잊지 못하고 현실과 혼동하는 세월호 유가족 등등. 이들 말고도 더 있다. 수화하는 침팬지로 연구되다 논문이 끝나자 버려져 의학실험 대상이 된 침팬지, 교회 마당 피자배달 박스에 분변과 함께 버려진 개, ‘장님에게 만져진 코끼리 같은 동물들이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아니라 등장생명들이다.

    이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연민에 가득 찬 목소리가 곧잘 일컫듯이 목소리 없는 자들이다. 얼마나 위험하고 무책임한 호명인가? 이들은 늘 말하고 있다. 우리가 들으려 하지 않을 뿐. 저자는 인도의 저술가이자 활동가 아룬다티 로이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목소리 없는 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고의로 침묵하게 되었거나, 듣지 않고 싶어 해서 들리지 않게 된 자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실 문제는 듣는 쪽에 있다. ‘듣지 못하는 무능력’, 나아가 듣지 않으려는 의지의 문제인 것이다.

    들을 수 있게 되면 많은 것들이 놀라운 방식으로 전도된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나섰던 노들야학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학생과 교사들은 버스를 가로막았고 철로에 자신의 몸을 묶었다.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지 않고서는 학교조차 갈 수 없다는 것, 사회 전체를 새로 배우게 하지 않고서는 야학에서의 작은 배움도 불가능하다는 것, 투사가 되어야 학생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치의 절멸수용소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는 이 끔찍한 수용소가 이방인은 적이다라는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고 증언한다. 우리 영혼 밑바닥에 이 문장이 자리잡자 어느 순간 논리적 전개를 통해 죽음의 수용소를 도출했다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한 곳이지만, 그것을 낳은 문장은 도처에 있다. 오늘도 우리사회는 수만 명을 시설에 격리한 채 사회적 안전, 효용, 비용 따위를 계산하고 있다. 이 시설에서 아직 가스가 피어오르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런 시설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사람들이다.

    이방인에 대한 우리의 적대감은 갈수록 심하게 증상이 되고 있다. 피부색이 희지 않은 이방인을 적대시하는 이 나라에 도착한 난민들은 위장 난민 여부를 심사받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그래서 이 심사를 통해 심사받는 것은 사실 우리와 이 나라다. 그들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를 포기하면 안 된다.

    1980, 장애해방운동의 길을 연 김순석 열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두 달 전 무단횡단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처벌을 받았다. 노견의 턱 때문에 휠체어를 탄 채로는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었다. 누가 위반자인가?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게 만든 사회인가,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은 장애인인가?

    요즘 국면에 절실한 통찰도 있다. 데모크라시는 인민(데모스)의 힘(크라토스)를 가리킨다. 민주주의의 요체는 인민의 힘이지만 대의제에서 우리의 관심은 대표로 향한다. 우리의 처지와 힘이 아니라, 후보의 매력과 유능함을 놓고 다툰다. 무능하고 나쁜 지도자가 문제이니, 유능하고 좋은 지도자를 뽑으면 해결된다고 믿는다. 정작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우리 곁의 한숨 소리인데 말이다.

    인문학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말이 정곡을 찌른다. 지식의 축적이 곧바로 좋은 삶으로 연결되지 않음은 인문학자 자신의 삶이 보여준다. 그러니까 인문학을 희망같은 것에서 떼어놓아야 한다. 공부를 무언가를 위한 그것이 설령 희망일지라도 수단이나 방편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희망때문에 하는 공부는 절망에 너무 취약하다. 인문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라면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일 것이다. 다만 무지의 의지로 외면해온 이야기일 뿐.

    그러므로 그의 책이 항용 그렇듯 이번 책에서도 몰랐던 사실을 새로 안 것보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알면서 더 놀라게 된다. 그러니까 그의 책은 두 번째 앎을 알려주는 책이다. 첫 번째 앎이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되는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라면, 두 번째 앎은 그 앎이 자기 삶 속에 어떻게 자리잡고, 타인의 삶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묻는 데서 나온다. 우리는 이미 들리던 목소리를 다시 들어야 하는 것처럼, 이미 알던 것을 다시 알아야 한다. 앎이 삶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좀 버겁다. 그리고 그만큼 벅차다. 그의 공부가 귀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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