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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동석의 천변만화(千變萬化)]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미국을 말하다관리자2021-09-28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미국을 말하다

    글_장동석(출판도시문화재단 문화사업본부장, 출판평론가)

     


    「곰」, 윌리엄 포크너 저/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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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현대소설에 기여한 공로가 크고 예술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한 작가가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1949년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면서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끝없이 변모하는 형식, 한없이 깊고 진중한 심리적 혜안, 그리고 선인이든 악인이든 기념비적인 캐릭터들을 담고 있는 당신의 작품들은 현대 영미 소설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를 칭송한 사람이 여럿이지만, 두 사람만 더 보탠다. 알베르 카뮈는 그를 일러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했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처럼 대단한 칭송을 듣는 작가의 이름은, 바로 윌리엄 포크너다.

    노벨문학상은 물론 카뮈, 마르케스 등이 사랑했지만 윌리엄 포크너는 의외로 한국 독자들에게 깊이 각인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작품 활동 시기도 겹치고, 세상을 떠난 시점도 엇비슷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비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이유는 하나둘이 아니다. 윌리엄 포크너는 산문시에 가까운 문장이 주는 난해함을 추구했는데, 혹자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했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연대기적 서사 속에 다양한 시점과 비연속적인 시간 구조를 끼워 넣음으로써 소설의 내러티브 자체를 실험했다. 한편 그의 작품들은 미국의 역사, 특히 남북전쟁 이후 남부 사회의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이 같은 작품 경향은 앞서도 언급한 헤밍웨이와 종종 비교되곤 하는데, 헤밍웨이가 전쟁 등 세계사적 사건들을 작품 소재로 차용해 인간의 존재 의미를 탐구했다면, 포크너는 미국 남부 사회의 변화상을 통해 인간과 역사가 어떻게 연관을 맺는지 성찰했다고 할 수 있다.

    윌리엄 포크너가 1942년 발표한 <>은 남북전쟁 이후 미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다양한 삶의 관점을 상징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은 연대기적 서사, 즉 주인공 아이작 매캐슬린의 성장을 주된 이야기 구조를 취하되, 아이작의 할아버지로부터, 아니 그 이전 신대륙을 차지한 사람들에게서 유래한 가문의 어두운 과거를 연결함으로써, 그 후손들은 물론 미국 역사에 미친 영향을 조명한다. 작품은 열여섯 살 아이작 매캐슬린이 열 살에 처음으로 따라 나선 사냥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친척 형 매캐슬린은 해마다 11월이 되면 일행과 함께 떠나는 두 주간의 사냥에 아이작을 겸허한 자세로 인내하며 스스로 황야에서 사냥꾼이라는 이름과 지위를 얻어보라며 동행시킨다.

    빅바텀이라 불리는 거대한 숲으로 해마다 사냥을 떠났지만, 소년의 눈에는 사냥꾼 일행에게서 사냥 의지같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숲의 주인인,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분명한 이름으로불리는, 올드벤과의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 해마다 사냥을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첫 사냥에서 올드벤과 조우한 소년은 전 생애를 황야에 바치며 인내하고 겸손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만큼 올드벤은 넓은 숲 자체가 답답하리만큼 협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거대함을 뽐내는 존재였다. 어려서는 풍문으로, 이어 사냥터에서 직접 대면한 곰 올드벤은 소년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그 무엇이었다. 매캐슬린 일행이 해마다 사냥을 떠나면서도 곰을 잡지 못하는 이유를 소년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사냥꾼 일행 모두가 단지 곰을 보려고 위험한 숲으로 나선 것은 아니다. 인디언 피가 섞인 백인 분 호갠벡은 오로지 올드벤을 사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용감하고 충직했지만 분별력이 없어 미덥지 못한 사람인 분은 총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도 곰 올드벤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끝내 분은 올드벤을 칼로 쓰러뜨린다. 물론 노란 눈의 사냥개 라이언이 올드벤과 사투를 벌인 뒤의 일이었다. 라이언은 아이작의 정신적 스승으로 검둥이 노예와 치카소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노인인 샘 파더스가 처음 발견해 길들인 개였다. 샘은 첫 눈에 라이언이 올드벤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길들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야생의 방식 그대로였다. 샘의 말 중 한 대목이다. “우린 그 개를 길들이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저 그 개가 제 본모습 그대로이기를 바라는 거죠.”

    올드벤은 분의 칼에 넘어지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샘 파더스에게 있어 올드벤은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의 번역을 맡은 민은영은 겸손과 긍지라는 가치라는 제목의 해설에서 올드벤이 샘에게 어떤 존재인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샘 파더스에게 올드벤은 투사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올드벤은 야생의 순수한 자유,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는 결연한 의지의 표상이었으며, 단순한 사냥감을 넘어선 바로 그 자신이었다.”

    아이작이 자연의 위대함을 경험했다면, 샘은 자연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샘에게 올드벤은 자연의 한 자락, 즉 자신의 몸과도 같았다. 반면 분은 자연을 오로지 정복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굴복시키지 못하면, 굴복 당해야 하는 관계는 얼마나 비참한가. 어쩌면 자연으로 바라보는 이 세 시선은 거대한 땅 미국을 바라보는 관점일 수도 있다고 세간의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 적절한 반증이 아이작의 할아버지에서 비롯된 어두운 과거에 대한, 아이작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세대의 이야기다. 아이작의 할아버지 캐로더스 매캐슬린는 신의 이름을 빙자해 원주민들의 땅을 차지했고, 그의 아들들은 흑인 노예들이 피땀, 아니 목숨을 바쳐 일군 땅을 오로지 제 것인 양 했다. 아들들, 즉 아이작의 아버지와 삼촌이 남긴 기록은 그들 입장에서는 꼼꼼한 하루의 일상을 정리한 것이었지만, 흑인 노예들에게는 삶의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끔찍한 기억일 수밖에 없었다.

    스물하나, 세상사를 분별하게 된 아이작은 그 땅의 상속을 거부한다. 샘과 라이언이 묻힌 곳을 다시 찾은 아이작은 그곳에서 미치광이 모습을 한 분과 조우한다. “여기서 꺼져! 만지지 마! 아무것도 만지지 마! 다 내 거야!”라고 외치는 분의 모습과 함께 작품은 끝을 맺는다. 윌리엄 포크너의 <>을 절대 친절한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포크너는 작품 서두에 <>을 쓴 이유를 명확히 밝힌다. 그 문장을 끝으로 어설픈 글을 마치고자 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당대 미국 사회를 향해, 아니 독자들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다면적일 수밖에 없는 이 문장의 해석은, <>을 정독한 후 독자 스스로에게 맡기고자 한다.

    그것은 황야, 그 어떤 기록보다 오래된 거대한 숲에 관한 이야기, 그 땅 전부를 자기가 샀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은 백인의 이야기이자 그 땅 전부가 자기 것이며 따라서 양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만큼 무자비한 인디언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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