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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동석의 천변만화(千變萬化)] 한 진정한 인간을 찾는 읽기와 쓰기관리자2021-10-28



     

    한 진정한 인간을 찾는 읽기와 쓰기


    글_장동석(출판평론가)
     

    「말」, 장 폴 사르트르 저/정명환 옮김, 민음사, 2008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글을 쓰는 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책을 읽고 도 한다. 책을 소개하는 방송, 책의 위의(威儀)와 가치를 알리는 강의나 강연은 당연히 일 수밖에 없다. 책과 관련이 없는 말이나 글은 늘 휘뚜루마뚜루지만, 누군가의 책을 알리는 글과 말은 언제든 반듯하려고 애쓴다. 나 하나 욕먹는 건 두렵지 않지만(은 아니지만), 서툰 내 말과 글 때문에 어떤 책의 저자나 불멸의 고전(古典)을 남긴 위대한 작가들이 욕먹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그 일에 길잡이가 되는 책이 몇 권 있다. 이태준 선생의 <문장강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에드거 앨런 포의 <글쓰기의 철학>, 모티머 애들러의 <독서의 기술>,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알베르토 망겔의 <독서의 역사>, C. S. 루이스의 <책 읽는 삶> 등등이 그런 책들이다. 헌데 이 책들보다 앞자리에 있는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 장폴 사르트르의 <>이다.

    <>은 사르트르가 중년의 나이를 지나는 시간에,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유년 시절의 기록들, 그중 읽기와 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회고한 책이다. 사르트르가 태어난 이듬해 세상을 떠난 아버지, 하여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한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이내 파리의 외가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로 사르트를 외할아버지가 구축한 책의 성채(城砦)에서 세계를 보며 성장했다. “나는 책에 둘러싸여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죽을 때도 필경 그렇게 죽게 되리라. 할아버지의 서재에는 도처에 책이었다.”

    글자를 알지 못해도 그곳에서 즐거웠다. 마치 신들의 세계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작달만한 고대의 유물들에 둘러싸인 이 작은 신전 속에서 뛰놀았다.” 할아버지는 그 신전의 사제”(司祭)나 다름없었다. 사르트르는 매일같이 뜻 모를 의식(儀式)에 참석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스스로 글을 깨치며 인류의 지혜와 씨름하기 시작한 그는, 현실과 몽상의 세계를 오가며 소박한 일탈을 즐겼다. 고전 애호가였던 할아버지 샤를 슈바이처의 서재는, 한마디로 별천지였다. <마담 보바리>스무여 번이나읽어 어떤 다락의 문장들을 전부 외우기도 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주인공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들의 심리 심연에는 어떤 생각들이 존재하는 궁구(窮究)하게 되었고, 사르트르는 곧 그들이 되곤 했다.

    서재가 신전이었던 사르트르에게 책은 곧 종교였다. “성직자의 손자인 나는 7층에서, 말하자면 세계의 지붕에서, 한가운데 나무의 높은 가지에 걸터앉아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사르트르는 스스로 내려오는 일이 없었다. 이경험이 그를 쓰는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다시 나의 상징적인 7층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또다시 문학이라는 희박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세계는 내 발 밑에 층층이 겹쳐 있었고, 모든 사물이 제각기 이름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사물에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곧 사물을 창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환상이 없었던들 나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르트르가 쓰는 사람 대열에 합류한 것은 일곱 살 무렵이다. 파리에서 독일어를 가르치는 교수였던 외할아버지와 잠시 떨어져 지내는 사이, 외할아버지는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편지를 부쳤는데, 그중 하나는 사르트르에게는 보내는 운문(韻文) 편지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운문이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스스로 작시법(作詩法)을 공부해 알려주었다. 다음이 중요하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사르트르에게 무엇이든 써볼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나는 운문의 답장을 긁적대다가 들켰는데, 그러자 두 여인은 어서 끝까지 쓰라고 격려하며 도와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도 힘을 보탰다. “이윽고 그 편지에 대한 대답으로 나를 찬양하는 시 한 수가 왔다. 나 역시 시로 대답했다.” 글을 쓴다는 일을 누군가의 칭찬과 도움이 있을 때, 다시금 무엇이든 쓸 수 있다.

    시를 쓰는 일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음을 깨달은 사르트르는 이내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책을 읽은 신나는 모험담을 다시 꾸며 썼는데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공상의 세계, 머릿속의 이미지를 밖으로 끌어내어 그것을 진짜 가구와 진짜 벽 사이에 현실화’”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글의 세계에 흥미를 잃었다. 말이 곧 사물의 진수(眞髓)라는 생각도 이런 생각을 부추겼다. 마음의 싸움은 계속되었지만, 사르트르는 결국 글 쓰는 자의 가치를 터득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으며, ‘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기쁨을 알았다. 공중의 노리개와 같던 어린애가 이제 자기 자신과 사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어렸지만 글 쓰는 자의 도리가 무엇인지도 알아갔다. 책을 읽어갈수록, 다시 말하면 위인들을 알게 된 나는 유명해지지 않고서는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 “있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영웅주의만이 자신의 열정을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을 멸시하기도 했다. 사르트르는 내 이웃을 살린다는 목적으로 신을 위해서 쓰기로 결심했다. 독자들이 독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은인으로 받들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겨우 아홉 살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묻고 싶지만, 사르트르는 그러했다.

    다시 읽기에 천착했고, 사르트르는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한 그 존재가 타성적으로 보존되는 것도, 현재의 마음의 움직임이 과거의 움직임의 결과라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미래의 기다림에서 탄생한 나는 눈부시게 온몸으로 비약했고, 순간순간이 나의 탄생이라는 예식의 반복이었다.” <>은 읽기와 쓰기를 알려줌에 있어, 어떤 어떤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에도 제목을 명시한 책이 몇 권 없다. 그런가 하면 쓰기에 있어서도 어떻게 어떻게 쓰라고, 일종의 팁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고민해 보았을 나와 가족, 나와 세상의 관계, 거기서 빚어지는 천태만상을 통해 다만 읽고 쓰는 일에 대해 말할 뿐이다. <>의 마지막 문장으로 어설픈 말과 글을 마친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기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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