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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명우의 책읽기] EP #10 누구에게나 일생의 과업은 필요하다관리자2021-11-25


    EP #10 누구에게나 일생의 과업은 필요하다


    글_노명우(사회학자)


    「트로이, 잊혀진 신화」, 마이클 우드 저/남경태 옮김, 중앙M&B, 2002


    허풍쟁이였음을 입증하는 정황 증거가 많기에 독일 출신의 사업가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의 증언 모두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자기 기억에는 과장과 축소가 개입함을 감안하면 그를 무조건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기엔 조심스럽다. 모든 증언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자기 미화가 스며들어 있다고 조심하면서 호메로스 세계의 무대인 트로이와 그가 맺은 일생의 인연 이야기를 들어보자.

    슐리만의 아버지는 그가 어린 아이였을 때 호메로스 영웅의 모험담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던 그 소년은 열 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에 트로이 전쟁에 관한 책을 선물로 받았다. 슐리만은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찍부터 일을 배웠다. 돈버는 일에 몰두하던 그는 트로이 전쟁에 관해 들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잊었었다. 사업가로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일군 그는 잊고 있던 호메로스가 들려준 트로이 전쟁을 다시 떠올렸고, 사업으로 번 돈을 트로이를 찾는데 쓰겠다고 결심했다.

    <일리아스>에서 묘사된 트로이 풍경을 실마리 삼아 트로이 발굴에 나선 슐리만은 현재의 터키 북서쪽의 하시를리크 마을 아래에서 전설의 도시 트로이를 발견했다. 사라진 고대 도시 트로이의 퇴적층 제2층은 트로이 전쟁의 흔적으로 인정되었다. 평생의 덕질이 평생의 과업이 되었고, 평생의 과업으로 인한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있었음을 증명하는 퇴적층 발견은 <일리아스><오뒷세이아>를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트로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도시라면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호메로스의 문학이다. 그러나 트로이가 발견된다면 트로이 전쟁을 그린 <일리아스> 그리고 트로이 전쟁에 참여 했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뒷세우스의 이야기인 <오뒷세이아>는 문학이자 동시에 역사기술서가 되는 셈이다. 슐리만의 발견에 의해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문학이면서도 동시에 역사책이 되는 기이한 위치를 획득했다.

    대전환이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지금과 같은 평가를 항상 누리지 못했으니까. 기독교의 시각에서 호메로스는 불온한 이교도 이야기꾼에 불과했고,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에 어울리는 새도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지어 수도까지 옮긴 동로마제국 즉 비잔티움은 비기독교적 고대 세계인 헬레니즘 자체를 적대시했다. 오히려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시기 로마를 정복한 북쪽의 비로마인(바바리안)은 고대 로마의 문화에 가까워지기 위한 방편으로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 흐름은 영국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나타났는데, 16세기 잉글랜드에서 <일리아스>가 번역되었고 19세기에 이르자 호메로스는 대중적인 고전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해상진출을 통해 대영제국을 건설한 잉글랜드의 입장에서 <일리아스><오뒷세이아>는 신사적 자질을 갖춘 남성 영웅의 교과서와 같은 구실을 했다.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의 시 <율리시스(오뒷세우스)>의 한 구절을 보라. 오뒷세우스는 19세기 잉글랜드 남성의 본보기이다. 그는 노래한다. “방랑을 멈출 수 없으니, 나는 인생을 찌꺼기까지 마시련다. 언제나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혹은 홀로 커다란 즐거움을, 커다란 고난을 맛보는 걸 즐겼다. 해안에서, 혹은 달리는 구름 사이로 비에 젖은 히아데스 성좌가 희뿌연 바다를 성나게 할 때, 나는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왜냐하면 늘 굶주린 마음으로 헤매면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기에 사람들이 있는 도시, 풍습, 기후, 의회, 정부, 그들 모두에게 나 자신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명예로운 존재였다. 저 멀리 바람 부는 트로이의 시끄러운 평원에서 나는 동료들과 전쟁의 즐거움을 마셨었다. 나는 재가 경험한 모든 것의 일부다.”

    1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함락되어 이스탄불이 되고 난 이후 기독교 세계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교도의 영역으로 용감하게 발을 들여 놓는 인물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우드(Robert Wood)는 기독교 잉글랜드의 통념상 산적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라 여겨졌던 소아시아 지역을 여행하고 1769<호메로스의 저작과 독창적 재능에 관한 논문>을 써서 트로이 찾기 열풍 확산에 기여했다. 1785년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르슈발리에(Jean Baptiste Lechevalier)는 로버트 우드의 책을 들고 트로이를 찾아 터키로 떠났다. 낭만적 헬레니즘의 투사 바이런은 1821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트로이 전설의 진실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나는 그 장대한 이야기가 역사의 진실이며, 그 위치도 실존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이야기는 내게 전혀 기쁨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에 뒤떨어진 후진국 독일에서 그리스적인 것에 대한 낭만적 사랑은 세계적인 제국이 되겠다는 야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1873531일 슐리만은 트로이의 지층에서 황금과 보석이 무더기로 발견했다고 주장했고, 아내에게 이 보물을 착용하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후 독일에서 고대 그리스는 하나의 징후가 되었다. 나치는 낭만적 그리스 열풍을 거름삼아, 베를린 올림픽을 준비했다. 나치는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베를린까지 성호봉송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나치가 고대 그리스의 후예임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아테네에서 채화된 성화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가 그리스 풍으로 설계한 베를린의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섰다. 낭만주의적으로 찬양된 고대 그리스는 베를린에서 나치즘의 위험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포장지가 되었다.

    징후로서의 그리스 열풍을 만든 트로이 보물은 1945년 돌연 베를린에서 사라졌다. 베를린에서 사라진 그 보물이 어디로 갔는지 소문은 무성했는데, 그 사라진 보물은 1993년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관에서 발견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한 러시아 군대가 그 보물을 가져간 것이다. 트로이 전쟁으로 사라진 트로이를 슐리만이 발굴하고 있을 때 1870년에서 71년 사이에 프로이센과 프랑스는 전쟁을 벌였다. 슐리만이 베를린으로 밀반출한 트로이 전쟁의 흔적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모스크바로 갔으니, 트로이의 보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기원전 12세기의 전쟁 그리고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그리고 그리스 낭만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베를린 올림픽을 치른 나치 독일이 저지른 2차 세계대전까지 겪은 것이다. 트로이아의 보물의 다음 행선지는 또 다른 전쟁이 결정하게 될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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