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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명우의 책읽기] EP #11 기억과 상상력: 호메로스를 읽는 방법관리자2021-12-15


    EP #11 기억과 상상력: 호메로스를 읽는 방법


    글_노명우(사회학자)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저/이기우 외 옮김, 문예출판사, 1995 


     

    말은 문자보다 발생 시간 상으로 앞선다. 말은 있는데 그 말이 기록된 것, literature가 없는 언어도 적지 않다. 문자는 말에 더해진 것이지, 문자로 기록되지 않는다고 해서 언어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학이라는 뜻으로 통상 쓰이는 literature의 라틴어 어원은 literatura인데 이 단어는 알파벳 문자를 뜻하는 litera에서 유래한다.

    고대 그리스 세계역시 문자가 없었던 오랜 시간을 보냈다. 미케네 문명(기원전 1600-1200)이 몰락한 후 알파벳이 도입되기 전까지 그리스인은 문자 없는 시대를 살았다. 문자로 말이 기록되지 않았던 그리스 세계에 셈족의 알파벳 문자체계는 기원전 9세기 혹은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서야 전파되었다. 기원전 8세기 말경 모세오경이 문자로 기록되었다. 문자가 그리스 지역에 전파되고 독립적인 도시국가 폴리스가 고대 그리스 세계 전역에 등장하던 격변기에 그 정체에 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수수께끼의 인물 호메로스가 등장했다.

    호메로스는 구전으로 전해지던 영웅 서사시(epos)를 문자로 기록하여 영웅 서사시를 literature로 변환시켰다. 트로이 전쟁에 관한 영웅 서사시는 8편이라고 알려지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서사시는 <일리아드><오뒷세이아>가 전부이다. 트로이 전쟁은 후기 청동기 시대 말엽인 기원전 1250-1180년 시기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일리아드><오뒷세이아>가 문자로 기록된 시기가 기원전 700년 경이라 하니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500여년이 지나서야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문자로 기록되지도 않았음에도 500여년의 세월을 트로이 전쟁에 관한 서사시가 살아남을 수 있었음은 사실상 기적에 가깝다. 이집트에서 온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기록된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두루마리가 담아낼 수 있는 텍스트의 양에 따라 24편의 노래로 나누어졌다. <일리아드><오뒷세이아>가 모두 24편의 에피소드로 나눠진 것은 파피루스 두루마리 1개에 기록될 수 있는 문자의 양과 관련 있다.

    월터 옹(Walter Ong)<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는 <일리아스><오뒷세이아>의 이 기적을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실마리가 가득하다. 그가 소개하는 밀먼 페리(Milman Parry)의 분석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육각운(hexameter)의 형태에 의존하여 단어나 어형이 선택되고 있는데, 호메로스는 육각운에 맞춰 노래를 짜맞추다라는 뜻을 지닌 랩소딘(rhapsōdein)을 행한 것이다(랩소딘 자체가 짜맞추다라는 뜻의 rhaptein과 노래라는 뜻의 ōide의 합성어이다). <일리아스><오뒷세이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관용구, 정형구, 판에 박힌 형태의 수사, 진부한 상투어는 정형구적인 사고의 조립에 의지해 기억을 유지하는 문자 이전 시대의 기억술의 흔적이다.

    밀먼 페리의 이러한 분석적 성과는 그들이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떠돌이 시인에서 찾아낸 문자와는 상관없는 순수한 구전예술인 에포스(epos)의 흔적 분석 덕택이다. 밀먼 페리는 앨버트 로드(Albert Lord)와 함께 보스니아 지역을 돌며 문자 기록 없이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 엄청난 길이의 서사적 노래가 구전으로 이어지는 전통을 찾아냈다. 이 전통에 대한 분석을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적용하여 밀먼 페리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창작원리에 대한 해석 지침을 제공했다. 그들의 여정은 시각화된 악보로 전수되지 않은 농민의 음악을 열정적으로 채집했던 작곡가 버르토크를 연상시킨다. 버르토크는 1905년 졸탄 코다이와 함께 당시의 최신 미디어인 에디슨 축음기를 가지고 헝가리 곳곳의 민속음악을 발굴했고 수백 개의 원통에 기록했다. 밀먼 페리가 버르토크의 시도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필먼 페리와 앨버트 로드는 구슬레(gusle)를 연주하며 서사시를 암송으로 연행하는 구슬라르(guslar)에게서 그들은 호메로스의 시의 형식이나 문체와 비슷한 고대 서사시의 전통을 발견했다. 구슬라르가 부르는 서사시는 운율이 호메로스의 육각운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일정한 운율을 따르고 정형구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동일했다. <일리아드><오뒷세이아>에 수시로 등장하는 투구를 흔드는 헥토르” “구름을 모으는 제우스” “올빼미 눈을 가진 아테네” “발 빠른 아킬레우스”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라는 정형구는 등장인물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면서도 동시에 운율에 맞춰 랩소딘, 즉 짜집기 되는 흔적임을 구슬라를 통해서 밝혀낸 것이다.

    호메로스는 문자 없이도 집단 기억 형식으로 전수되어 오던 민중적 지식을 집단을 대표하여 문자로 옮겨 놓는 사람이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의 도움으로 구술 연행으로 전수되어온 세상의 이치에 대한 지식은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잠바티스타 비코는 시적인 지혜라는 개념으로 플라톤이 반기를 들었던 호메로스의 세계를 옹호했는데, 비코가 민중의 지혜를 표현하기 위해 시적인 지혜라고 불렀던 지식의 또 다른 형태의 추진력은 다름 아닌 기억이다.

    정보가 손실되지 않고 보존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단순기억도 있지만, 비코는 시적인 지혜를 옹호하기 위해 기억에는 단순 기억에 머물지 않는 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지적했다. 비코에 따르면 상상력은 기억을 변형시키고, 창의력은 기억을 새롭게 전환시키거나 적절한 배열과 관계 안에 자리 잡도록 한다. 호메로스를 민중적 지혜를 대변하는 시인으로 간주하는 비코는 넌지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오뒷세이아>를 독해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는 셈이다. 우리는 <일리아드><오뒷세이아>를 역사적 사실이 보존되어 있는 단순 기억을 위한 저장고로 간주하며 읽을 수도 있다. 만약 이 독해를 선택할 경우 <일리아드><오뒷세이아> 곳곳에서 발견되는 논리적 모순과 사실에 부합할 수 없는 과장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비코의 주장처럼 <일리아드><오뒷세이아>를 상상력과 창의력의 측면에서 독해한다면, 호메로스는 구전된 서사적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암송하는 사람, 그 암송된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 놓은 글 쓰는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민중의 대변인 작가가 되는 셈이다. 암송하는 호메로스를 만날 것인가 필경사 호메로스를 만날 것인가 아니면 민중의 대변인 작가 호메로스를 만날 것인가는 우리의 독해법에 달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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