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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남의 행간 속 사회] 변화 속의 지속관리자2021-12-15


     


    변화 속의 지속


    글_이창남(경북대 교수)

    「모든 저녁이 저물 때」, 예니 에르펜베크 저/ 배수아 옮김, 한길사, 2018

     

     

    지난달 말에 예니 에르펜베크라는 독일 작가가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을 수상하러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접했다. 일정에는 없었지만 대구에도 한 번 모실 수 있을까 해서 주최측에 연락했다. 체류기간이 짧아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작가가 경주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어서 가까운 대구에서 강연회를 열 수 있었다.

    지역에서 세계적인 작가의 강연회를 여는 것도 적잖이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동대구역 손님맞이 주차장에서 만난 작가는 명성에 비해 소탈했고, 흔히 글쓰는 이들이 그렇듯 상상력이 풍부해 보였다. 한국에 처음 방문한 작가는 경주 어느 산에서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는 스님을 만났고, 왕릉의 봉분들이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고 편안하게 풀어냈다.

    독일 통일 30년이 넘은 지금 굳이 동독작가라는 말을 쓰기가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에르펜베크는 동독출신이다. 국내에 동독출신 작가들이 다수 문학상을 수상하러 한국을 방문하곤 한다. 이것도 하나의 경향일 수 있는데, 한국에 여전히 분단국가의 갈등과 이념적 대결이 남아있어 통일을 먼저 경험한 동독작가들에게 특히 관심이 쏠리는 것 같다. 국내에는 대표적인 동독 작가 크리스타 볼프의 작품들이 다수 번역되었고, 아담과 애블린을 비롯해서 쾌활한 이야기들을 선보인 잉고 슐체도 한국을 방문했다.

    에르펜베크는 통일 당시에 대학생이었고, 그 이후 30년 이상의 통일 과정을 몸소 경험했다. 작가는 주로 사회주의권 국가로서는 상당히 선진적이라고 자부하던 동독이 흡수통일되면서 겪게된 상실감과 서독 중심의 일방향적 통일의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강연했다. 그의 작품은 정치성향이 강하지 않고, 동년배 동독 사람들은 정치에 염증을 가진 세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생활인으로서 통일의 문제점들을 목도했기 때문에 강연은 더욱 절실하고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정치적이지 않으면서도 상당히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에서 작가는 독일제국시기에서 통일 이후까지의 긴 과정 속에서 주로 일상의 작은 사물들과 사람들의 변화에 집중하는 미시적 시각을 보인다. 집과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세한 터치로 그려내는 그곳에 집이 있었을까(을유문화사)는 이러한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사물들의 운명과 그곳을 거쳐 흘러간 사람들의 운명을 반추하면서 변화하는 삶의 양상들을 포착하고 있다. 또한 모든 저녁이 저물 때(한길사)는 죽음을 맞게 된 이가 우연히 죽지 않았을 때 엮어질 이야기를 풀어내며 변화하는 삶의 가벼움을 무겁게 통찰하고 있다. 인생은 하루살이처럼 가볍기도 하지만 그 삶은 세대를 거쳐 무겁게 지속된다. 작는 이러한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줄을 타듯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경주에서 작가가 인상적으로 보았다는 봉분들 속에 누군가 들어가 진흙이 된 이후에도 한국인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후에도, 또 그 후에도. 작가가 비극과 상처를 이야기하지만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의 이야기 속에서 유럽을 얼룩지게해온 인종적 배척, 전쟁과 같은 역사적 과오들을 지속되는 삶이 이기기 때문이다.

    변화와 지속에 대한 이러한 작가의 일관된 인식은 최근작에서 난민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강연 중에 그는 난민과 같았던 동독인들과 헝가리인들이 난민을 배척하는 역설적 상황에 대한 우려를 담담히 표명하기도 했다. 삶도 사람도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그러나 삶은 어떻게든 지속된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해보이는 사실인데, 이러한 통찰을 되새기는 저녁이 여느 때와 달리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의 말대로 한 사람이 죽은 하루가 저문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이 저무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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