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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원의 글줄 사이로 路] 소나타 형식을 가진 과학책관리자2021-12-17


     

    소나타 형식을 가진 과학책

     

    글_유지원(그래픽 디자이너)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저/이중원 옮김, 쌤앤파커스, 2019
     

     

    책의 생각 사이로[路]

    이탈리아 출신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경이로운 과학 저술가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모든 면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가슴 벅찬 감탄과 감동을 남긴 과학책이었다.

     

    카를로 로벨리의 필력은 또다른 저서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서 익히 접한 바 있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정말로 놀라기 시작한 건 책을 6-70% 정도 읽어나가던 무렵이었다.

     

    이 책은 음악 양식인 ‘소나타’와 같은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자연과학자는 다시 인간의 한계와 저력을 기꺼이 품으며, 악곡과도 같은 이 책을 고전 형식의 작곡처럼 마무리해 나갔다.

     

     

    소나타 형식은 3부의 구성을 가진다. 주제가 제시되는 제시부, 그 주제가 먼 여행을 떠나며 모험을 겪는 발전부, 그리고 다시 고향에 돌아오듯 본 모습으로 회귀하는 재현부. 이 책의 3부 구성도 이와 같다. 시각적으로는 역아치형 구조다.

     

    1부인 제시부에서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이고도 신비로운 질문에 응답하고자 한 인류의 지적인 여정이 아름답고도 포괄적으로 펼쳐진다. 아인슈타인, 볼츠만, 뉴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이 중요하게 제시된다.

     

    2부인 발전부는 짧다.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올린 시간 개념을 파괴한다고 할까.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인 루프 양자중력 이론의 눈으로 본 시간 개념으로 발전해가며, 가장 이상하게 들리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3부인 재현부에서는 2부에서 파괴된 시간이 재건된다. 카를로 로벨리가 아무리 필력이 뛰어나도 루프 양자중력 이론을 지나오면 일반 독자의 뇌는 지쳐있게 된다. 바로 이 무렵부터 카를로 로벨리는 지친 독자를 살살 달랜다. 여기서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에 이어 철학과 문학, 그러니까 칸트와 후설, 하이데거, 그리고 마침내 프루스트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한층 화창해져간다. 여전히 쉽지는 않은 내용이지만, 그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돌려주기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다름아닌 우리가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우리 자신이 우리가 느끼는 시간을 존재시킨 원인이라고.

     

     

    과학 저술가로서 카를로 로벨리의 저술 특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다. 이전에 연구자로서 그의 위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시간의 양자적 특성을 연구하는 양자 중력 이론 물리학자다. 양자 중력 이론은 양자 이론과 중력(일반상대성) 이론을 통합하려는 어려운 분야다. 이 이론 중에 끈이론과 고리이론이 있는데, 전자가 주류이며 카를로 로벨리는 후자의 관점인 루프 양자 중력 이론을 취한다. 저자 자신도 이런 관점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물리학자들도 모두 동의하는 내용이 아니며, 철학자들도 검토를 계속하고 있다’고 밝힌다.

     

    저술가로서 로벨리는 통찰도, 이를 전달하는 방식도 빛이 난다. 독자들은 전문지식을 담은 책에서 난해함을 불평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쉬운 내용을 원한다기보다는 정확하게는 오리무중인 전달력에 불만을 느끼는 편에 가깝다. 어려운 물리학 책이 쉽기만 할 수는 없다. 로벨리 저술에서 진정한 광채를 발하는 대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아름다운 문장과 필력, 사고를 가졌다.

     

    2. 인문학적이고 문화예술적인 분야들을 넘나들며, 자신의 생각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또 그 통찰들을 연결해내는 풍부한 교양을 갖추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이탈리아의 풍광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데도, 어쩐지 이 유럽인의 고전적 사유로부터 이탈리아와 그리스에 면한 지중해의 바람이 그립게 실려오는 느낌도 든다.

     

    3. 과학사의 사건들과 지적 여정에 있어 숱한 저술들이 그렇듯 나열적인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매우 적극적인 사고를 펼쳐가며 관계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에 능숙하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의 사이에는 모순이 있는데 이 둘이 사실은 다 옳았다고 통합한 인물이 아인슈타인이라며 이 셋의 관계를 엮어낸 대목에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4. 그가 독자에게 전달하는 가장 귀한 것은 물리학에 대한 ‘리터러시’다. 독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물리학의 교훈을 내면화해서 아름답고 유용하게 꺼내어 쓰도록 해준다. 과학자가 아닌 독자가 과학책으로부터 정말로 얻고 싶은 것은, 정보와 지식을 넘어 ‘과학으로부터 교훈과 통찰을 스스로 읽어내는 능력’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바로 이 리터러시를 전해준다.

     

    이렇듯, 이 과학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술은 여러 층위에서 아름답다.



    책의 몸 사이로[路]

     

    사진.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정말 어떤 형태라는 것일까? 시간은 시계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표지 디자인의 그래픽에 암시되어 있다.

     

    이 그래픽은 책의 1부, 소나타 양식의 구조로는 ‘제시부’의 내용들을 드러낸다.

     

    1. 시간은 연속된 ‘선’이 아니라, 흩어진 ‘점’으로 존재한다. 이 점은 사물이 아닌 사건들이고, 무수히 많은 작은 고유 시간들이다.  

     

    2.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3. 입자들은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진실로 존재한다. 이 상호작용이 세상의 사건이고, 방향도 없으며 선형적이지도 않은 시간의 최소 기본 형태다.

     

    4. 네트워크, 즉 관계망을 형성한다. 시공간의 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과 그 관계들만 존재한다.  세상은 양자 사건들의 방대하고 무질서하며 느슨한 그물이다.

     

    1부에서는 이런 내용들을 맛깔스럽게 풀어나간다. 이 그래픽은 원서 표지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타이포그래피와 판형, 후가공은 국문판인 국내서 쪽이 더 공들여 제작되어 있다. 단단하게 실제본한 다부진 몸을 가진 책이다.

     

    국내 과학책 일반의 디자인은 보통 세 가지 유형 중 하나를 가진다. ‘꾸러기 과학왕’같은 제목에 어울릴 법하게 왁자지껄 투박하거나, 학술서 같이 단조롭거나, 에세이적 특성을 드러낼 때는 별 특색없이 밋밋하다. 최근에 국내 과학 저술가들이 활약을 펼치면서 과학책 디자인도 때로 서정적이기도 하고 그래픽 측면에서도 준수해져가는 추세를 보인다.

     

    하지만 아직 국내 과학책의 디자인에서 설레어본 적은 없었다. 외서의 예를 들자면, 수학책 중 유클리드의 『원론』 디자인에 두근거린 적이 있다. 1847년,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 올리버 번이 윌리엄 피커링 출판사에서 발간한 판본이었다. 이후에도 몇몇 국외 디자이너들이 이 디자인의 현대적인 리프로덕션 판본을 펴내기도 했다. 카를로 로벨리는 현대물리학의 지식을 전하는 동시에 결사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책을 썼다. 그만큼 결사적으로 아름다운 디자인을 가진 국내 과학책을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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