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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원의 글줄 사이로 路] 우리와 닮은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관리자2022-01-25


     

    우리와 닮은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
     

    글_유지원(글문화연구소 소장)

     

     「눈아이」, 안녕달 저, 창비, 2021

     

    책의 생각 사이로[路]

    하얀 눈이 쌓인다. 세상을 새하얗게 덮은 하얀 눈이. 뽀득 뽀득 뽀득.

     

    아이는 등교를 하다가 뽀득 뽀득 움찔거리는 눈덩이를 발견한다. 이 커다란 그림책의 책장 가득히 부드러운 파스텔톤 색연필로 동글동글 칠하고 연필로 윤곽을 잡은 따뜻한 그림이 펼쳐진다. 아이는 누가 가르쳐주거나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당연하다는 듯 눈덩이에게 동그란 눈과 입을 뽀득 뽀득 그려준다. 눈덩이는 방긋 웃다가 커다랗게 탄성을 지른다. 우아. 그렇게 ‘눈아이’가 생겨났다.

     

    안녕달 작가의 『눈아이』는 아이와 눈아이 사이의 우정과 이별, 그리고 기다림을 그린 그림책이다. 두 친구 사이의 우정이란 안타깝게도 화사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우정은 돌봄과 살핌, 책임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번거롭게 여기지 않는 마음, 때에 따라서는 내 것을 기꺼이 나누는 마음, 이런 마음과 행동은 상대를 나 자신처럼 아낄 때에 나온다. 또 관계라는 것은 즐겁고 고운 경험과 기억들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어려운 일을 겪으면 갈등도 생긴다. 어려움을 감수하고도 상대를 아끼려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용기를 내야 한다.

     

    따뜻한 햇볕이 비치자 눈아이는 녹기 시작한다. 따뜻해서 눈물을 흘리고, 녹아 내리며 작아지고 더러워져 간다. 다른 아이들이 지나가다가 두 아이를 보고 말을 걸었을 때, 아이는 눈아이를 잡았던 빨간 장갑을 낀 손을 쓱 놓는다. 이때 눈아이는 울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더러운 물이 되어도 우리는 친구야?”

     

    이 그림책에서 가장 문학적인 순간은 여기가 아닐까. 이 장면을 바라보는 어린이들의 마음에는 따뜻한 온기와 서늘하게 슬픈 냉기가 동시에 퍼져나갈 것이다. 안타까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이상한 감정이 든다. 아이들은 이렇게 성큼 문학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더러운 물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마음, 이런 속상한 일을 친구에게 털어놓아야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왜 영원토록 즐겁고 행복하게 함께 지낼 수 없는 걸까? 왜 죽음을 겪고 이별을 해야 할까?

     

    내가 더러운 물이 되어도 우리는 친구야?” 눈아이가 이런 질문을 하고 다음 장에서 아이가 “응…….”하고 답변하는 순간, 우리는 두 아이의 숨결을 느낄만큼 이 장면에 몰입하게 된다. 그들의 둥그런 옆모습은 어린이의 실제 얼굴 크기만 하다. 아이들 곁에 바짝 다가선 느낌이다. 눈아이가 질문을 할 때는 부드러운 하늘색 공기의 기류가 눈아이의 머리처럼 둥글게 흐르고, 아이가 답을 할 때는 아이로부터 공기가 움직인다. 그들의 말소리가 숨결에 실려 공기를 떨게 하는 이 그림의 묘사를 보면, 그들이 우리 귀에도 간신히 들리는 귓속말을 속삭이는 것 같다. 이렇게 독자는 그들의 친밀한 우정에 농밀하게 동참한다.

     

    이후 눈아이는 봄빛 속에 사라져간다. 그랬다가 여러 계절을 지나서 다시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이는 하얀 계절과 함께 돌아온다. 뽀득 뽀득 방긋 웃으면서. 돌아온 눈아이는 헤어졌던 그 아이일까, 새로 태어난 아이일까? 어른은 안다. 한번 스러져 간 생명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그렇지만 다시 돌아온 눈아이가 그때 그 눈아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은 간절하고도 진실하다.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 어른에게는 이것이 어떤 의미일까? 얼마 전 유아를 거쳐 영아 시기까지 거슬러가는 발달심리 책들을 읽었다. 우주가 매크로-코스모스라면, 인간의 몸과 마음은 소우주인 마이크로-코스모스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물질과 공간과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우주 탄생의 시점인 빅뱅으로 거슬러간다. 한 개인의 탄생 시점인 영아기까지 거슬러가는 이유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발달의 초기 시점으로 거슬러가 보는 것이다. 그림책을 마주하면 어릴 적 맞닥뜨렸던 무시무시한 의문들을 다시 만난다. 잊고 살아온 근본적인 것들을.


    눈이 내리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눈을 굴린다. 문화적 배경과 관계없이, 그 동그란 덩어리에 눈과 입을 그린다. 그렇게 우리와 닮은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다. 사람은 사람의 얼굴에 가장 강하게 반응한다. 6개월이 채 안 된 아기들에게 여러 형상의 이미지를 보여주면, 아기들은 그중 사람 얼굴과 닮은 형상을 더 오래 바라본다고 한다.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서 살려내고 키워주는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게 해서다. 그 얼굴이 아기가 최초로 자주 접하는 긍정적인 형상이어서다. 그 얼굴은 사랑으로 힘든 세상을 견디게 해주는 든든한 보호 장치여서다.

     

    지난 해에, 눈도 못 뜬 아기 길고양이가 내 곁에 잠시 머무르다 간 적이 있었다. 짧게 머무르다 간 그 생명을 지켜내느라 내 일상은 말도 아니었다. 이런 생명을 키우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길고양이를 애지중지하면서도, 벌레는 여전히 징그러워하는 내 마음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는 왜 눈사람을 만들까?’를 생각하다가, 나는 어떤 답에 다가가면서 그랬던 내 마음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와 닮은 모습에 반응하고 호감을 느낀다. 이질적인 모습에 위협을 느낀다. 실제로 인류의 생존에 해를 끼쳐온 생물의 형태적 특징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준다. 모든 생명은 존중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생명을 사랑한다고도 감히 장담할 수 있을까. 그저 거기까지가 생존에 얽매인 한 개체로서 한계인 거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눈사람을 만드는 마음은 우리와 닮은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그 닮음에서 강렬한 애착을 찾는다.

     

    책의 몸 사이로[路]


     


    사진. 안녕달 작가의 『눈아이』(창비) 속 작가의 연필 글씨. 작가는 아이와 눈아이가 서로 성격이 다른 글씨를 갖도록 했다(위). 둘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각자의 성격은 서로 조금 섞이기도 한다(아래).© 안녕달 『눈아이』, 창비 제공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에서 글자는 두 층위를 가진다. 작가가 그림처럼 연필로 직접 쓴 글씨, 그리고 컴퓨터로 타이핑한 활자(폰트). 서사로 이어지는 내용은 정갈한 폰트를 사용하는 한편, 등장인물의 인격적인 목소리가 반영되는 대사와 감탄사, 그리고 의성어, 의태어는 연필 글씨를 쓴다. 우와, 호오, 뽀득 뽀득…….

     

    그림책은 혼자 조용히 읽기도 하지만, 엄마나 다른 어른이 아이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는 경우가 많다. 침묵의 독서가 아니라 소리의 독서인 낭독을 한다. 몸으로 내는 소리를 육성이라고 한다. 몸으로 쓰는 글씨는 육필이다. 육성과 육필은 몸의 언어로 연결된다. 내용과 감정이 고조되며 글씨가 점점 커지면 별다른 지시가 없더라도 그 글씨를 읽는 소리도 자연스럽게 점점 따라 커지게 된다.

     

    등장인물의 대사를 소리 내어 읽어주는 것은 배우처럼 연기하는 구연의 성격을 갖는다. 같은 사람의 목소리이지만, 등장인물에 따라 조금씩 다른 소리를 연기한다. 안녕달 작가의 연필 글씨도 같은 사람의 필체이지만, 등장인물에 따라 조금씩 다른 성격을 부여한다. 작가의 다른 작품 『쓰레기통 요정』에서 할아버지 목소리는 서예 흘림체를 살짝 흉내내고 있었다. 이런 글씨를 보면 어흠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연상하게 된다.

     

    다시 『눈아이』로 돌아와서, 두 아이의 목소리는 각각 연필로 쓴 글씨의 몸을 가진다. 아이는 중성(모음)이 길고 윗부분의 부리가 살짝 꺾인 글씨체, 눈아이는 눈사람의 몸집답게 초성(닿소리 자음)이 크고 둥글며 중성(모음)이 짜리몽땅한 글씨체로 말을 한다. 두 아이에게 주어진 글씨체는 처음부터 각자의 성격을 유지하지만, 대화가 섞이면서 이따금 닮아가기도 한다. 서로 마주보고 깊어가는 우정처럼 두 아이의 글씨체는 닮았다가, 각자는 또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며 달라졌다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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