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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의 웃음의 원천, 희극의 뿌리를 읽다] 재판광 길들이기 -아리스토파네스의 『벌』-관리자2022-03-28

    재판광 길들이기
    -아리스토파네스의 『벌』-


    글_김헌(서양고전학자)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전집1」, 아리스토파네스 저/천병희 옮김, 숲, 2010

     


    우리는 벌떼들이 마치 벌집에 모이듯 떼 지어 모여 들어서는

    더러는 집정관(Arkhōn)의 법정에서, 더러는 11인 위원회와

    함께, 더러는 오데이온 연주장에 모여 재판을 한다오(1107-1109)

     

    아테네의 노인들이 우스꽝스러운 벌떼들의 복장을 하고 노래를 한다. 늙고 힘이 빠진 이들은 농사일도 제대로 할 수 없고, 군대 소집에 응하여 전쟁에 나갈 수도 없다. 천하에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라 낙담하고 의기소침할 수도 있는 처지지만, 아테네에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기원전 507년부터 클레이스테네스의 주도로 직접 민주정(Dēmokratia)이라는 독특한 정치체제를 이루어왔던 아테네에서는 노인들도 어깨에 힘주고 기를 펴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정의 아테네는 법과 정책을 결정하는 민회에든,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서든, 일반 시민이면 누구든 참가하여 국회위원이나 판사, 검사, 변호사처럼 직접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있다. ‘먹기 살기도 힘든데, 할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이걸 다 제쳐두고 어딜 간단 말인가? 왜 자꾸 오라 가라 하는 거야?’ 불만이 있자, 급기야 나라에서는 하루 일당에 가까운 꽤 짭짤한 수당을 주었다. 그래도 힘 좀 쓰겠다 싶은 사람들은 수당 대신 일을 택하기 일쑤였다. 그들의 정치적 공백을 메꾼 것은 할 일없는 노인들이었다. 집에서 노느니, 민회든 재판정이든 나가면 돈을 벌 수 있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재판정에 판사자격으로 나간다면, 돈 몇 푼 버는 것 이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있다. 피고든 원고든 승소하기 위해서는 재판관석에 앉아 판결의 표를 던지는 수많은 배심원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했다. 늙고 힘도 없어 주눅 들기 쉬운 노인들은 자신들 앞에서 쩔쩔매는 피고와 원고의 모습을 보고 힘을 얻는다. 지금 무대 위에서 아테네의 노인들이 벌떼의 복장을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재판정에 참가해 벌떼처럼 침을 쏘는 힘이 있다. 그러니 노인들 가운데는 재판이라면 환장하는 재판광들이 생겨난 것이다. 기원전 422, 레나이아 제전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런 재판광을 풍자하는 희극을 발표했다. 주인공은 재판이 열린다면 가슴이 뛴다. 배심원으로 제비가 뽑힌다면, 그렇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포기한 결석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자신의 존재이유를 맘껏 느끼고 뽐내며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갖게 될 위세를 이렇게 노래한다.

     

    그렇지. 그대 처음부터 곧장 나는 우리의 권한이 어떤 왕권

    못지않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어. 비록 늙어가기는 하나

    배심원(또는 재판관)보다 더 행복하고 더 부럽고 더 즐겁고

    더 두려운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우선, 내가 아침에

    침상에서 나오자마자 육 척 장신의 세도가들이 법정의 난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서 다가가면 공금을 횡령한

    그 부드러운 손을 내게 내밀면서, 머리를 숙이고는 처량한

    목소리로 애원하지. “영감님, 부디 저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전에 공직에 계실 때나, 부대에서 회식을 위해 식료품을 살 때

    거스름돈을 떼먹은 적이 있으시다면.” 전에도 무죄 석방되도록

    내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겠지.(548-558)

     

    이런 사람들이 재판정을 가득 채우고 판결을 내린다면, 제대로 판결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전문적인 법률 지식도 없고, 연민에 호소하며 알랑거리는 말재주에 귀가 팔랑거리며, 행여 뒤로 찔러주는 돈에 매수되기 십상인 사람들이 배심원으로, 판결의 권한을 쥔 재판관으로서 행세한다면 말이다. 기원전 399, 아테네를 대표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런 시민 재판관들의 어리석은판결에 희생되어 독배를 마셔야 하지 않았던가? 소크라테스를 풍자했던 아리스토파네스였지만,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아테네 재판정의 풍경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특히 그는 아테네 법정을 이와 같은 모순된 대중영합주의(Populism)가 판치도록 만든 클레온이 몹시 못마땅했다.

    아테네의 민주정을 급진적으로 발전시킨 페리클레스는 일반시민들이 정치적인 회합, 특히 재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재판수당을 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시민들의 민주적 태도를 고양하겠다는 의도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영리한 정치적 행보였다. 그의 뒤를 이어 아테네에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했던 클레온은 재판수당의 금액을 획기적으로 올려서 대중의 지지를 더욱더 높였다. 돈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산 셈인데, 그 힘으로 그는 페리클레스가 시작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국인 스파르타와의 평화협정 따위는 없다며 강경한 주전론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반전주의 평화주의자였던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런 호전주의자 클레온의 대중영합주의가 내내 못마땅했다. 둘 사이의 악연이랄까, 그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데뷔 초부터 불거졌다.

    아리스토파네스는 18세의 나이에 당대 소피스트들을 비판하는 연회참석자들이라는 작품으로 대 디오뉘소스 제전의 희극무대에 처음 데뷔하여 준우승을 차지했고, 그 이듬해인 기원전 426년에는 바빌로니아사람들이라는 작품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그 작품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클레온을 공격하다가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서야만 했다. 다행히 무죄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이후로 아리스토파네스는 수많은 작품에서 클레온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당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고통을 반영하듯, 반전과 평화의 키워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에서는 극의 초반에 이런 말을 한다.

     

    관객 여러분, 우리에게 너무 거창한 걸 기대하지 마세요...

    이 희극에는 관객을 향하여 바구니에서 밤톨을 던지는

    노예들도 나오지 않고, 진수성찬을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대식가인 헤라클레스도 나오지 않습니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를 헐뜯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클레온이 운이 좋아 위세를 떨친다고 해도

    이번에는 그를 묵사발로 만들어놓지 않을 참입니다.(56-63)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결국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클레온의 시혜로 아테네의 법정의 물을 흐리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정을 일그러뜨리면서 재판수당이나 탐하는 고약한 재판광의 이름이 바로 필로클레온, 클레온을 사랑하는(Philo-)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노인네를 집에 가두고 재판정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려는 정신 제대로 박힌 아들의 이름도 가관이다. ‘브델뤼클레온클레온을 역겨워하는(Bdelu-) 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아리스파네스가 클레온을 엿 먹여왔지만, 이번 작품만큼에서만은 자제하겠다더니 그게 아니었다. 주인공들의 이름에서부터 클레온은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재판정에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 갇힌 아버지를 위해 아들은 가정 법정을 열어주는데, 소송에서 맞붙은 당사자는 두 마리 개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마리는 누가 봐도 클레온인 분장을 하고 있다. 클레온을 한 마리 개로 분장시켜 놓고 아테네 시민들 모두 보는 앞에서 재판에 미친 늙은 노인네의 판결을 받게 만든 것이다. 게다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는 아예 클레온의 실명을 거론하며 거칠게 논쟁을 벌인다. ‘아테네 민주정의 법정은 개판이오! 그게 다 클레온 때문이라오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을 보면서, 우리 시대의 법정은 얼마나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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