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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을 기억하라관리자2022-04-26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을 기억하라


    글_권재현(작가)

     
    「파친코」, 이민진 저, 문학사상, 2018

     

    어떤 소설은 첫 문장으로 깊이 각인됩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가 대표적입니다. 그보단 덜 유명하지만 D H 로런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첫 문장인 현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의 시대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재미작가 이민진이 영어로 쓴 소설 파친코역시 첫 문장이 길이 기억될 듯합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흥미롭게도 세 소설 모두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미국의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애플TV+가 올해 드라마화해 다시 화제가 된 이 작품은 1911년 식민지 조선의 부산 영도에서 시작해 1989년 일본 오사카에서 끝납니다. 한국인 4대의 이야기라지만 정확히는 열여섯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 김선자 가족 3대의 일본 생존기입니다.

     

    한국에서도 요즘 재일교포라는 말 대신 쓰기 시작한 자이니치(在日)’의 신산한 삶을 다룬 작품입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본토에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3D일만 도맡아 하며 억압과 설움 속에 살다가 19458월 이후엔 법적으로 외국인으로 철저히 차별받으며 살아야 했던 한반도 핏줄의 가족사를 다룬 작품입니다.

     

    사실 자이니치의 기구한 삶은 한국인에겐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자이니치 예술가인 유미리와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최양일의 영화, 정의신의 연극 등을 통해 일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들의 애달픈 사연이 수없이 소개됐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세계인들에겐 낯선 이야기입니다. 가장 큰 장벽은 일본어와 한국어를 뒤섞어 쓰는 자이니치 특유의 언어문화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민진 작가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미국 주류 교육(예일대 역사학과와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받고 로펌에서 일했으며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4년을 살았습니다. 한국 일본 미국 3개국 언어는 물론 문화에 상당히 정통합니다. 무엇보다 2004년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 미국에서 꾸준히 주목받은 작가로 성장했습니다. 이런 남다른 이력이 자이니치를 세계화한 문학작품을 낳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작가가 쓴 소설 파친코대지를 쓴 펄 벅이나 분노의 포도를 쓴 존 스타인벡 같은 미국 선배 소설가들의 자연주의적 전통에 충실합니다. 지독한 가난과 극심한 차별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위엄을 지키려고 발버둥치지만 비극으로 점철된 선자네 가족사를 거대한 자연변화의 일부처럼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겪는 비극의 본질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임에도 그에 맞서는 그들의 대항이 지극히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점이 이러한 느낌을 더욱 강화합니다. 그러나 자이니치의 저항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집단적이었습니다.

     

    가난한 어촌소녀 선자는 열여섯 나이에 두 남자를 만납니다. 제주 출신으로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성공한 야쿠자 사업가가 된 한수와 병약한 몸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목회자가 되려는 이삭입니다. 유혹자 한수는 선자에게 사랑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안겨주고 구원자 이삭은 낯선 이국땅에서 새 출발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희망을 품고 건너온 일본에서 조선인의 삶은 더욱 혹독했고, 그나마 등불과 같은 존재였던 이삭은 사상범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 끝에 숨집니다. 선자는 한수의 핏줄인 노아와 이삭의 핏줄인 모자수(모세의 일본어)를 힘겹게 키우며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꿈꿉니다. 하지만 제2의 이삭이 될 줄 알았던 노아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뒤 뜻밖의 선택을 거듭하며 영락을 거듭합니다. 반대로 툭하면 주먹질하던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어 부를 일구지만 손가락질 받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노아와 모자수의 장점 두루 갖춘 솔로몬(모자수의 아들)은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 마침내 선자의 꿈을 이룰 듯했으나 결국 토사구팽 당하고 맙니다.

     

    소설 제목이 파친코인 이유가 뭘까요? 일본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없었던 자이니치가 경제적 부를 일굴 수 있는 창구 중 하나가 파친코(슬롯머신) 도박장 운영이었는데 서로 다른 성향의 노아, 모자수, 솔로몬의 인생이 결국 파친코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파친코 비즈니스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빠져있습니다. 다만 소설 속 자이니치들은 하나같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식으로 비즈니스를 한다고만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정공법을 피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제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자이니치의 비극을 다소 운명론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여섯 나이에 사랑의 불장난에 빠졌던 선자의 삶이 불과 열넷의 나이에 육체적 사랑에 눈뜨는 솔로몬에게서 되풀이되는 대목에서 뚜렷해집니다. 한수의 친자인 노아가 이삭의 닮은꼴로 살고, 이삭의 친자인 모자수가 한수의 닮은꼴로 사는 것 역시 그런 운명이 빚어낸 아이러니로 다가섭니다.

     

    사실 소설에는 이런 운명론을 끊어낼 힘찬 칼날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이삭-노아-모세-솔로몬이란 등장인물들 이름에 함축된 기독교적 세계관입니다. 선자와 노아 모자를 구원하기 위한 이삭의 이타적 희생으로 뿌려진 그 씨앗이 어떤 식으로든 싹을 틔우는 구조를 갖췄다면 문학적 완성도가 더 높아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복선은 이삭의 죽음과 함께 돌연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엉뚱하게도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 채워버리고 맙니다.

     

    이런 소설에 비해 드라마의 작법은 정공법에 더 가깝습니다. 연대기 순으로 된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1931년의 선자와 1989년의 솔로몬의 이야기를 숨 가쁘게 병치시킵니다. 선자와 솔로몬의 삶이 공명한다는 점을 매의 눈으로 잡아낸 결과입니다. 이를 위해 노아와 모자수 형제의 이야기는 과감히 덜어냈습니다. 단순히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장치에만 머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명은 일본사회의 구조적 불의에 저항해야한다는 교감과 행동으로 발현됩니다. 이를 위해 소설에서 일본 주류층에 의해 토사구팽당한 것으로 묘사된 솔로몬이 드라마에선 선제적으로 반기를 듭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소설의 첫 구절은 드라마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도전정신만큼은 오히려 드라마가 더 생생하게 형상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엔 등장하지만 소설에선 언급조자 안된 사건도 있습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입니다. 소설에서 자기이해에 충실한 것으로만 묘사된 한수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겪으며 영혼의 상처를 입은 인물로 그려집니다. 자이니치에 대한 일본사회의 원죄를 형성하는 제노사이드 문제까지 직격탄을 날린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뿌리 뽑혀 떠돌이 삶을 사는 디아스포라의 문제는 서구사회에 더 익숙한 것입니다. 멀리는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한 뒤 유럽 곳곳을 유랑하다가 홀로코스트이 비극까지 겪은 유대인과 그 출원지는 불분명하지만 유럽 곳곳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던 집시가 있습니다. 가까이는 한때 잉글랜드의 종주국이었다가 그 식민지로 전락한 뒤 대영제국의 2등국민 취급을 받던 아일랜드인과 미국으로 건너온 뒤 무수한 갱스터를 배출해 대부시리즈를 낳은 이탈리아이민도 있습니다. 이런 디아스포라에는 차별과 배척이란 구조적 문제가 먼저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폭력과 범죄라는 부작용도 분명 존재합니다.

     

    소설 파친코는 서구사회는 물론 이를 줄기차게 외면해온 일본사회에도 디아스포라로서 자이니치의 존재를 강렬하게 각인시켰습니다. 드라마 파친코는 그 디아스포라가 개인의 운명으로 치환될 문제가 아니라 해당 사회의 구조적 차별과 배척의 문제에 뿌리박고 있다는 메시지를 뚜렷이 강화시켰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가 더 남아있습니다. 그 반작용으로 형성된 폭력과 범죄의 문제까지 직시하는 것입니다. 바로 고한수의 세계입니다. 소설에선 고한수의 원죄를 그의 친아들인 노아가 짊어지는 식으로 살짝 비껴갔습니다. 이 글을 쓸 때까지 마지막회(8)가 반영되지 않은 드라마가 과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정공법을 취할지는 함께 지켜봐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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