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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준호의 카멜롯] 빛나는 별이 된 시인관리자2022-04-26


    빛나는 별이 된 시인


    글_정준호(음악 컬럼니스트)

     


    「죽기 전 100일 동안」, 존 에반젤리스트 월시 저/이종인 옮김, 마음산책, 2002

     

    바이런, 셸리와 더불어 영국 낭만주의 3대 시인을 꼽히는 존 키츠. 나는 데이비드 린의 흑백영화 <밀회> 가운데 주인공 부부가 낱말 맞히기를 하는 장면을 보고 키츠에 처음 관심을 가졌다. ‘나 죽으면 어쩌나 두려울 때When I have fears that I may cease to be’라는 시 가운데 빈칸으로 둔 로맨스를 정답으로 알려주며 아내는 복잡한 심경에 빠진다. 키츠 전기영화 <브라이트 스타>(2009)25세에 객사한 천재 시인의 마지막 1년여에 걸친 사랑을 섬세한 화면에 담았다. 제인 캠피언 감독은 1997년 계관시인 앤드루 모션이 쓴 키츠의 전기에 기초해 직접 대본을 썼다. 영화는 키츠보다 오히려 연인 파니 브론의 존재를 부각했다. 사실 오랫동안 브론은 키츠의 마지막 해를 더욱 파국으로 몰고 간 철부지 골칫덩이로 인식되던 차였고, 20세기 후반 들어 그런 비난의 시각이 반전을 맞고 있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존 에반젤리스트 월시의 전기는 모션보다 뒤인 2001년에 나왔고 이듬해 국내에도 번역되었다. 월시는 모션을 비롯한 당시 키츠 연구자들이 브론을 지나치게 복권하고자 했다고 생각해 균형감을 되찾기를 주문했다. 캠피언이 영화를 발표하기 훨씬 이전이므로 월시의 책을 참고할 수 있었겠지만, 영화 <브라이트 스타>는 오히려 키츠가 바랐던 이상적인 여성상에 가깝게 브론을 그렸다. 키츠의 삶이 생소할 독자를 위해 그의 만년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818년 겨울 조실부모한 유망 시인 키츠가 친구 찰스 브라운과 런던 외곽 햄스테드 히스에 온다. 그 무렵 폐결핵을 앓던 키츠의 남동생이 세상을 떠난다.

    18194월 미망인 브론 부인과 세 자녀(파니와 두 동생)가 키츠의 이웃이 된다. 파니는 의상과 사교에 관심이 많은 명랑한 소녀였다. 그녀는 키츠로부터 문학 수업을 들으며 가깝게 지낸다. 반면 키츠는 그녀의 무심한 행동에서 자주 상처받고 힐난했다. 그는 이 무렵 파니에게 39통의 편지를 보냈고, 역시 그녀에게 헌정한 밝은 별이여를 비롯해 영문학의 금자탑으로 손꼽히는 일련의 찬가Ode’를 썼다.

    1820년 내내 각혈을 동반한 투병을 이어가던 키츠는 이탈리아에서 요양하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913일 배에 오른다. 화가 조지프 세번이 키츠를 동반했다. 세번은 키츠에 비해도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6주의 지루한 항해와 다시 열흘의 검역을 마친 키츠와 세번은 나폴리를 거쳐 여드레 만에 로마에 도착했다.

    182011월 로마 스페인 광장 옆 삼층집(현재 키츠 셸리 박물관)에 세 든 키츠와 세번은 인근 핀초 언덕까지 산책하며 건강을 추스르려 했지만, 키츠는 오래지 않아 침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 폐결핵을 선고받은 키츠는 세번의 혼신을 기울인 간병도 보람없이 223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세번의 편지로 런던의 지인들에게 알려진다.

     

    영화와 월시의 책이 가장 다른 점은 파니 브론의 됨됨이이다. 영화도 파니를 옷과 무도회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아가씨로 그렸지만, 키츠가 그 때문에 좌불안석하는 장면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단 한 번의 오해가 해소된 뒤로 두 사람은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눈다. 반면 월시는 브론을 시종일관 키츠를 몸달게 한 철부지로 그렸다. 일례로 키츠가 병석에서 써보려던 시의 주제는 밀턴의 코무스에 나오는 사브리나 여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방종한 처녀들을 보호하고 이끄는 존재였다. 월시는 키츠가 파니를 아름다움의 결정체로 이상화하면서 그녀에게는 자신을 뛰어난 시인이 아닌 그 자체로 좋아하라는 모순된 태보를 보였음을 지적한다.

    모션의 책을 못 본(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나로서는 월시를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 월시는 키츠가 파니를 만나기 직전에 사귄 이자벨라 존스라는 여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밝은 별이여를 비롯한 일련의 연애시는 파니가 아닌 이자벨라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다. 줄리엣을 만나기 전 그녀의 사촌 로잘린을 열렬히 사랑했던 로미오와 짝인 것이다.

    월시의 책에서 돋보인 것은 키츠 사후에 벌어진 사건의 면밀한 추적이다. 월시는 세번이 성심껏 간병한 미담이 로마와 본국의 영국인들에게 알려지면서 많은 칭찬과 후원을 받은 내력을 소개한다. 세번은 키츠 생전에 그의 요청으로 봐둔 개신교 묘소에 고인의 청대로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시인이 잠들다라는 비문을 적어 기렸다. 뒷날 세번은 로마 주재 영국 영사 자리까지 맡았고 키츠 곁에 안장되었다.

    키츠가 죽기 전 병문안 온 사람 가운데 발렌틴 야노스라는 스페인 시인이 있었다. 야노스는 뒤에 영국으로 건너가 키츠의 여동생 파니’(키츠의 어머니와 여동생 모두 프란시스, 파니였다)와 결혼했다. 세번과 파니 키츠는 만년에 우연히 로마 스페인 광장 옆 하숙집에서 만났다. 세번은 자신이 평생 누린 행복이 오빠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술회했다.

    파니 브론은 키츠 사후 얼마간 충격을 받았지만, (깊은 병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몇 년 뒤에 열두 살 연하의 평범한 남성과 결혼했다. 그러면서 키츠에게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점차 잊혔다. 중년이 된 파니는 자신이 키츠에게 받은 39통의 편지가 장차 큰 가치를 가질 것임을 잘 알았다. 그녀는 자녀를 불러 아버지가 죽으면 세상에 발표하라며 편지를 건넸다. 예측대로 1878년 편지가 출판되었을 때 키츠의 명성은 대단했고, 그가 보낸 연서의 파장은 엄청났다. 키츠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라는 오명까지 쓴 파니의 복권은 그녀가 파니 키츠에게 오빠가 죽은 뒤 보낸 31통의 편지가 1937년 공개되면서 이루어졌다. 키츠와 자신의 사랑이 남들이 감히 넘겨짚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간절한 것이었다는 내용이었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키츠와 파니는 문학사상 가장 애틋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된다. 월시는 그것이 지나친 신격화이며 한 발짝 떨어져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시인의 불꽃 같은 삶 못지않게 뒷이야기도 흥미진진하지만, 결국 키츠의 천재적인 시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브라이트 스타>에서 키츠는 낱말 맞히기에 쓰일 정도로 유명한 시구를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머지않은 죽음을 예감한 것이다. 전문의 졸역이다.

     

    나 죽으면 어쩌나 두려울 때

    내 펜이 충만한 머릿속을 다 추수하기도 전에 죽으면

    높은 책더미가 글로 가득 찬 곳간인 듯한데

    그 잘 영근 낟알을 갈무리하기 전에 죽는다면

    그리고 별빛 가득한 밤의 얼굴에서

    진정한 로맨스의 어렴풋한 상징을 봤음에도

    더 이상 살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이 들 때

    마법과 같은 손으로도 그 흔적을

    다 베끼지 못하고 삶을 마치면 어쩌나

    그리고 한동안 만났던 아름다운 그대

    그대를 다시 못 보면 어쩌나 생각할 때

    마법의 힘도 즐겁지 않으면 어쩌나

    지각없는 사랑의 힘마저도

    그때는 이 넓은 세상 끝에 홀로 서서 생각할 겁니다

    사랑과 명예가 의미 없는 것으로 잠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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