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TITLE

    [노마의 변경에서 책 읽기] '한국의 셰필드'가 출현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관리자2022-04-26


    '한국의 셰필드'가 출현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글_조형근(사회학자)

     

    「자본주의의 미래: 새로운 불안에 맞서다」, 폴 콜리어 저/김홍식 옮김, 까치, 2020
     

    잉글랜드 북동부의 도시 셰필드는 예로부터 좋은 쇠로 유명했다. 영문학의 시초로 꼽히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등장인물인 교활한 방앗간 주인 심킨이라는 자가 지닌 무기 중에도 셰필드산 주머니칼이 나올 정도라고. 산업혁명과 20세기를 지나며 셰필드는 철강산업으로 번영했다. 물론 세상만사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어떻게 마무리하는가가 중요할 뿐. 셰필드산 좋은 쇠의 끝은 좋지 않았다.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셰필드의 철강산업은 놀라운 속도로 무너져버렸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수많은 가족이 붕괴됐다. 그 시절 셰필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아프고 유머러스하게 그린 영화가 풀 몬티. 저예산 영화였지만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했다. 한국에서도 IMF 위기 때인 1998년에 개봉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저자인 영국 경제학자 폴 콜리어의 설명을 들으면 셰필드라는 도시와 풀 몬티라는 영화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조금은 각별해진다. 셰필드 철강산업에 사형선고를 집행한 것은 한국의 철강산업이었다. “세계의 반대편에서는 부상하는 시장경제인 한국이 새롭게 철강산업을 일구고 있었다.” 1980년대부터 한국의 철강 생산이 셰필드보다 이익률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일하던 숙련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되었고 숙련직을 얻을 가망이 없었다.” 다른 많은 도시들이 셰필드와 비슷한 사례를 반복했다.

    셰필드의 쇠퇴는 서구 선진자본주의 사회가 품고 있는 수많은 난치병들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어떤 문제들일까? 저자가 주목하는 가장 근본적인 층위는 바로 세계화다. 세계화로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글로벌 대도시에는 자본과 고급인력이 집중됐고 엄청난 번영이 찾아왔다. 반면 신흥국과의 산업 경쟁에서 뒤진 지방은 점차 쇠퇴하고 그곳의 저학력 노동자들은 일자리와 삶의 존엄을 잃고 있다.

    글로벌 대도시와 지방 사이의 지리적 분단의 정치적 결과는 매우 치명적이다. 대도시의 고학력 능력주의 엘리트들이 개방과 다양성의 미덕을 찬양하는 동안, 쇠퇴한 지방의 저학력 노동자들은 점차 폐쇄적 토착주의에 기울고 있다. 좌우파 주류들은 모두 대도시에 우호적이다. 이들은 공리주의와 롤스주의라는 양대 이데올로기에 근거한다. 둘 다 개인주의에 기초하고, 공동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능력주의를 애호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우파가 생산성의 능력주의를 표방하고 그래서 부자를 찬미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쉽게 이해된다. 좌파가 윤리성의 능력주의를 주창한다는 건 무슨 말일까? 윤리적으로 좋은 사람들을 찬미한다는 비판이다. 요컨대 다양한 소수자 정체성을 긍정하는 정체성의 정치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이 주류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에 뜨거운 열정의 옹호자들이 있다. 주류에게 환멸하고 진절머리를 내는 대중들에게 급속히 지지를 얻고 있는 대중영합주의자들이다.

    저자는 좌우 주류 이데올로기들의 가장 큰 이론적 문제가 이성을 모든 것의 앞에 두는 이성 중심주의에 있다고 비판한다. “이성이 가치에 닻을 내리는 것이지, 가치가 이성에 닻을 내리는 것은 아니, “이성은 열정의 노예라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주류 이데올로기들은 이성에 특권을 부여해서 자신들의 논리적 세계관을 현실에 적용하려 한다. 그런 비현실적인 시도 아래 2차대전 이후 서구정치가 쌓아올린 진보의 토양은 붕괴되고, 정치와 사회는 극단적으로 분단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저자가 지향하는 방향, 아니 차라리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방향은 공동체에 뿌리를 두는 실용적 사민주의. 그것은 대중들이 살아가는 특정한 장소적 정체성에 기반하고, 협동조합운동과 같은 호혜적 운동들과의 연대에 기초한다. 대도시 기반 중산층 지식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공동체의 실용적 호혜성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사민주의의 전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배타적인 국민주의 대신 위험하지 않은 애국주의를 수립해야 한다고도 강조한다. 뿌리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사람들, 공유정체성에 기반한 공동체의 회복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주장이다.

    대안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대도시의 토지소유주와 엘리트들이 얻는 초과이득에 대한 과감한 과세다. 단지 토지소유주만이 아니라, 집 없는 고소득자에게도 대도시 거주로 인한 집적의 초과이득에 대해 과세해야 한다는 발상이 독특하다. 증세로 확보한 재원을 단지 지방의 저소득층에게 재분배 차원에서 지원한다는 발상은 옳지 않다고 강조한다. 재분배-복지를 넘어선 생산적인 일자리, 산업의 창출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노동함으로써 살아간다는 자존감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다.

    어떤 대목들에서는 멈칫하게 된다. 예컨대 윤리적 가족의 회복이라는 주장. 계급 불평등을 가장 강력하게 재생산하는 기반이 가족이며, 가족 바깥에서 이 불평등을 축소하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하층계급에게서 윤리적 가족을 복원하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윤리적 가족 복원의 시도가 어떻게 다양한 가족, 가족 바깥의 사람들을 억압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을지 묻게 된다.

    이민과 난민 수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떠나지 않고서도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들이 떠나게 되는 이유 중 상당수는 영국과 같은 나라들의 역사적 책임에서 연원한다. 게다가 이미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과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을까? 저자는 말하지 않는다.

    이런 의문들, 한국 상황과의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어볼 만하다. 통상적인 진보의 관점에서 보면 동의할 수 없거나 불편한 이야기, 주장들이야말로 이 책의 장점이 두드러지는 대목들이다. 이 책이 서구에서 큰 화제가 된 이유일 것이다. 그 중 상당수는 우리도 이미 직면했거나 앞으로 직면할 문제들이다. 서울의 지식인들은 무관심할 지 몰라도 이미 한국의 셰필드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주민, 소수자에 대한 반감도 두터워지고 있다. 그 쟁점들을 진보의 수사나 구호로만 넘길 수는 없다. 먼저 겪은 이들의 경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