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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 '나의 해방일지'에 대한 신화적 독법관리자2022-05-25


    '나의 해방일지'에 대한 신화적 독법


    글_권재현(작가)

     
    「네가 바로 그것이다」, 조셉 캘벨 저/박경미 옮김, 해바라기, 2004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 정신 같아. 그래서 밤이 더 제 정신 같아.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제목 적어 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뭐에요? 나 여기 왜 있어요?’ 91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디 한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불 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윈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박해영 작김석윤 연출)의 여주인공 염미정(김지원 분)의 꽤 긴 분량의 대사입니다. 경기도 베드타운에 살며 서울로 통근하는 삶이 피곤하고 고단한 이 20대 여성 디자이너의 내면 풍경은 왜 이토록 염세적인 걸까요? 왜 수많은 드라마의 다른 주인공처럼 사랑타령에 목을 매거나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몸을 불사르지는 못할망정 평생을 살아도 해답을 얻을까 말까한 저런 문제로 고민하는 걸까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전근대 사회를 살던 사람은 자연과 공동체 그리고 신과의 일체감이 강했기에 염미정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에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래서 염미정보다도 훨씬 어린 잔 다르크 같은 시골소녀조차 자신의 존재이유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신념과 확신에 가득 찬 삶을 살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2500년 전 싯다르타가 절절히 느낀 근원적 불안과 고독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엔 잠시 스치는 바람처럼 지나갔을 그 감정이 오늘날 현대인에겐 피치 못할 일상이 됐습니다. 그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허수아비처럼 또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환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염미정과 달리 얼토당토 않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열광하고, ‘명품으로 포장된 사치품 구매에 심취하고, 내 집 마련에 영끌하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그들도 염미정이 던지는 질문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회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맞대결 해야 합니다. 여기 염미정과 비슷한 이유로 교회를 떠난 뒤 염미정과 같은 고민을 하던 청춘이 있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아일랜드계 가톨릭신자였지만 교회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전 세계 신화를 연구한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1904~1986)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영웅 신화의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일상을 불편하게 느끼고 낯선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 뒤 엄청난 시련 속에서 단련되고 성장해 다시 귀향한다는 구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입니다. 캠벨의 삶 역시 같은 패턴을 보입니다. 기독교신화에 환멸을 느껴 다른 수많은 신화들을 찾아 모험을 떠납니다. 배교자라는 비난을 견디며 펼친 그 여정 속에서 모든 신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를 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해낸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다시 유대기독교 신화로 돌아와 이단적 해석이란 비판 속에 그 진정한 가치를 설파합니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는 그가 세계의 모든 신화에서 발견한 공통원리가 유대기독교 신화에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펼친 강연을 모아서 정리한 책입니다. 책의 제목은 고대 인도의 경전인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산스크리트어 표현인 'Tat tvam asi'의 번역어입니다.

     

    캠벨은 염미정 같은 현대인이 느끼는 본질적 고독과 불안의 원친이 히브리 성경(구약)의 창세기 안에 이미 담겨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브(선악과를 먼저 먹은 사람)와 아담이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건의 본질은 이후 신이 에덴동산 앞을 지키게 한 2명의 케루빔(천사와 유사한 존재)을 통해 설명된다고 풀어냅니다.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너와 나가 하나로 통합된 일원론적 세계에서 그것들이 이분법으로 분별되는 세계로 진입한 의식적 사건을 형상화한 글이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바로 그런 일원론의 세계이며 그 밖에 위치한 인간의 세상은 이원론의 세상입니다. 그렇기에 에덴동산 밖을 지키는 케루빔 또한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지요.

     

    캠벨의 영웅설화와 이를 접목하면 인류의 원형으로서 이브와 아담은 강제로 추방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 모험에 나선 것으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나서 이성의 간지로도 표현되는 분별력을 갖춘 인간은 이후 문명이라는 것을 일궈내지만 고독과 불안, 또는 공허함을 달랠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 남은 또 하나의 과실, 바로 생명의 나무에 열린 열매는 결코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T S 엘리엇이 노래한 황무지의 내면풍경이자 염미정이 말하는 인생의 공허함 역시 바로 그런 허기의 표현인 것입니다.

     

    해답은 하나입니다. 다시 에덴동산으로 귀향하는 것. 인류의 영웅 신화가 완성되기 위해선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신의 저주를 풀어내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 저주를 풀고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지도와 열쇠가 담긴 성배가 곧 예수신화라고 캠벨은 설파합니다.

     

    예수는 모든 인간적 기획의 산물인 두려움욕망을 극복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것이요, 욕망은 삶에 대한 것이니 바로 에덴동산을 지키는 두 케루빔의 이름인 것입니다.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 불교의 두 수호신도 같은 기능을 하니 전자는 욕망, 후자는 죽음을 상징한다는 해석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겁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질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수용하는 예수가 바로 그 모범입니다. 또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그 무수한 종말론적 표현이 에둘러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때 비로소 천국으로 표현되는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갈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 천국은 미래에 도래할 천상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는 순간 지금 이곳에서 신과 나의 합일이 이뤄지고 물아일체가 이뤄지는 에덴동산이 실현된다는 은유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깨달음은 네가 바로 그것이다와 일맥상통합니다. 캠벨은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라거나 장작을 쪼개보시오, 나는 거기에도 내가 있소. 돌을 들어보시오, 거기에도 내가 있소와 같은 예수의 말 속에서 그 단초를 발견합니다.

     

    또 종말론과 묵시론에 담긴 진정한 메시지가 두려움과 욕망을 베어내고 신과의 합일을 체험하는 순간 바로 지금 이 땅위에 하느님의 나라, 에덴동산의 문이 열린다임을 알려주는 성경 구절들을 찾아냅니다. “하늘나라는 너희들 안에 있다. 그 나라가 위에 있는가? 그렇다면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래에 있는가? 그렇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너희들 안에 있다가 대표적입니다. 남미정이 말하는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윈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와 정확히 공명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신화를 역사가 아니라 은유로 읽어내는 순간 무수한 기독교의 딜레마가 풀리게 됩니다. 동정녀 잉태신화는 우리 안에 영적생명으로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에 대한 은유가 됩니다. 예수의 부활은 삶에 대한 욕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순간 개체적이고 파편적인 나를 뛰어넘어 통합적이고 일원적 에덴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음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곳에서 생명의 나무에 열린 열매를 먹게 됨으로써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에 대한 은유입니다.

     

    돌아온 탕자 캠벨은 이렇게 역사와 신화를 일치시키려는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기독교를 해방시킵니다. 다른 무수한 신화들은 무시간적인 반면 유대기독교 신화는 구체적 시간인 역사 속에서 그 계시가 이뤄진다는 강고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화를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문자주의와 역사주의가 끊임없이 창궐합니다. 캠벨의 해법은 이러한 기독교신화에 내재된 치명적 바이러스를 예방하고 통제해주는 백신과 같습니다.

     

    캠벨이 다른 모든 신화를 미신 취급하는 기독교의 오만함을 희석시키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해방시켰다면 프랑스 출신의 문학사상가 르네 지라르(1923~2015)는 다른 모든 신화와 차별화되는 예수신화의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기독교의 독자성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래서 캠벨과 지라르를 대립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역시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는 두 케루빔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캠벨과 지라르를 이항대립적으로 읽어내기 보다는 상보적으로 읽어내라고 권하겠습니다.

     

    이러한 캠벨의 길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나의 해방일지를 신화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고단하고 지긋지긋한 황무지 같은 인생에 한줄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서로를 추앙하기로 한 염미정과 구씨(손석구 분)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그곳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 이브와 아담입니다.

     

    이브가 먼저 선악과를 깨물어 먹었듯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두려움과 욕망을 먼저 끊어내야 함을 깨달은 미정이 먼저 네가 바로 그것이다를 실천에 옮깁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모르기에 두렵고 욕망의 대상이 되기엔 너무 하찮은 개똥이같은 구씨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영혼의 번지점프를 감행하자고 말합니다. 영원히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두려움과 욕망조차 재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아담은 예전 에덴동산에서 그랬듯이 그런 이브의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걸었던 모험에 나섭니다. 과연 그들이 살아서 천국을 보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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