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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헌의 웃음의 원천, 희극의 뿌리를 읽다] 여성 정치의 판타지 -아리스토파네스의 『여인들의 민회』-관리자2022-05-25

    여성 정치의 판타지
    -아리스토파네스의 『여인들의 민회』-


    글_김헌(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전집2」, 아리스토파네스 저/천병희 옮김, 숲, 2010

     

     

    내가 보니까, 우리 도시는 언제나 악당들을

    지도자로 써먹어요. 설령 어떤 한 사람이

    훌륭하게 된다 해도, 열흘은 악당이 된다니까요.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나쁜 짓을 더 많이 할 거예요.(176-179)

     

    기원전 392, 아테네의 한 여인이 끌탕을 한다. 그 여인의 이름은 프락사고라. ‘행동으로(Prax-) 광장(Agora)을 이끄는 자라는 뜻에 걸맞게 집안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거리로 나선다. 그렇다면 그녀의 해결책은 뭔가? 어떻게 해야 악당이 정치를 못하게 하고, 유능하고 훌륭한 인재를 골라 시정을 맡긴다는 말인가? 도무지 누군가에게 권력을 맡기는 일이 왜 생선을 고양이에게 맡기는 것처럼 불안한 것일까? 누굴 지지하고 표를 던져도, 누가 당선이 되도 미덥지 못하고,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게 권력의 속성이고, 인간의 속물근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헤아려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27년 동안 전쟁을 치렀고, 결국 패배했다.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했고, 전쟁의 패배로 인해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막강한 주도권을 상실하고 시들어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8, 그런데 여전히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원인이 뭘까? 프락사고라는 모든 문제가 남자들만이 정치적인 권한을 가지고 시정을 이끌어나가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아테네는 기원전 508, 독재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참주 힙피아스를 몰아내고 인류 최초로 민주정을 시행하였다. 특권층이나 독재자가 아니라, 일반 대중(Demo-)이 권력(Kratia)의 주체가 되는 혁명적인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그 혁명의 혜택은 오직 아테네 출신의 성인 남성들만이 누렸다. 어린이나 외국인, 노예들은 물론, 아테네 출신의 성인 여성조차도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민주정인가? 왜 남성만이 시민으로서 권력의 주체가 된다는 말인가? 아니, 그래서 뭐 남자들이 제대로 정치를 하긴 한다는 말인가?

     

    내 말을 들으면, 아직 구원받을 수 있어요.

    우리가 여인들에게 도시를 넘겨야만 한다고

    말하는 바입니다. (209-211)

     

    프락사고라는 아테네 여인들을 아침 일찍 모았다. 남편 대신 남편의 옷을 입고, 가짜 수염을 달고 남자로 변장해서 의회로 잠입하여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킬 작전을 짠 것이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자질이 더 낫다. 그건 집안 살림에서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그러니 나라 살림 역시 여자들이 더 잘 할 것이라고 자부한다. 여인들은 프락사고라의 신념에 따라 전쟁이 끝난 후 도탄에 빠진 도시를 구할 방법은 여인들에게 있다고 결연히 일어선 것이다. 프락사고라는 아테네 여성들을 설득하여 남성으로 변장하게 한 후, 남편들이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손을 쓴 다음 함께 민회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인들을 설득했던 수사적 언변으로 우리는 도시를 여인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외쳤고, 함께 변장해 들어간 여인들은 큰 소리로 환호하며 민회의 분위기를 압도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민회에 참석했던 크레메스는 뒤늦게 민회로 달려온 프락사고라의 남편 블레퓌로스에게 민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전해준다.

     

    도시를 여자들에게 넘기기로 결의했소.

    그것만은 도시에서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455-457)

     

    아테네 민주정에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바로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전적으로 여성들만의 정치였다. 과연 여성들은 어떤 개혁안을 내놓을까? 프락사고라는 자신의 계획이 훌륭하다고 확신하면서도 시민들이 받아들일지 고심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실제 상황이 아니다. 대 디오뉘소스 제전에서 열린 희극경연대회의 무대 위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연출한 정치적 판타지. ‘프락사고라의 가면을 쓴 배우가 무대 위에 서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을 향해 외치는 것일 뿐, 현실은 아니다. 객석의 관객들은 모두 아테네 성인 남성이다. 정치에서 그랬듯, 희극과 비극경연대회의 객석에서도 여성은 배제되었다.

     

    프락사고라: 난 내가 쓸모 있는 조언하리라 믿어요. 하지만 관객이

    내 개혁을 받아들이려고 할까요? 익숙한 옛것에 매달리지

    않을까요? 나는 그 점이 가장 두려워요.

    이웃: 개혁에 관해서라면 염려하지 마시오. 전통을 버리는 것보다

    우리가 더 좋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583-587)

     

    결의를 다진 프락사고라는 마치 민회에서 연설하듯, 관객들을 향해 새로운 정치 개혁을 내놓는다. 그러나 프락사고라의 개혁은 보수적인 남성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었다.

     

    모든 재산을 만인이 공유하며, 모두가 공유재산으로 살아가고,

    빈부격차를 해소하자는 것이 저의 제안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넓은 땅을 경작하는데, 다른 사람은 묻힐 땅도 없다거나, 한 사람은

    많은 노예를 거느리는데, 다른 사람은 노예가 한 명도 없는 일은

    없게 할 겁니다. 만인이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자는 겁니다.(590-594)

     

    사유재산을 폐지하여 빈부격차를 없애며 모두 공평하게 살아가자는 제안,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다. 물질적인 재산뿐만이 아니다. 여자들도 공유재산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를 없애고, 누구나 원하는 이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며,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도시가 책임지고 함께 양육한다는 것이다. 식사도 모두 모여 공동으로 한다. 불평등이 없는 사회, 이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유토피아, 프락사고라는 신세계의 계획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아니, 이미 그런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녀는 서로 원하는 짝을 찾느라 정신이 없고, 모두들 행복한 표정으로 공동 식사장으로 나가는 장면이 극의 후반부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관객들, 아테네의 시민들, 즉 남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여성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만들어나가는 세상을 동경하고 열망했을까, 아니면 그저 허탈한 웃음으로 정치적 판타지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했을까? 아니, 여성들이 현실 정치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라는 남성들의 확신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을까? 바깥일은 남성들의 몫이고, 집안일은 여성들의 몫이라는 관행이 견고한 그때,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현실적인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의 프락사고라의 목소리는 십여 년 뒤에 철학자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입에서 메아리친다. 아내들의 소유나 혼인 또는 출산 등, 이 모든 걸, 속담에 따라, 최대한으로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된다네.”(423e) 아내와 남편을 공유한다는 생각에서부터 나아가 여성들의 정치 참여에 관한 혁신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맥을 잇는 것 같다. 나라의 조직과 관련되는 것들 중에서 무슨 기술 또는 무슨 일과 관련해서 여자와 남자의 성향이 같지가 않고 다른가?”(455a) 정치의 영역에서 여성이 배제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항변이다. 물론 플라톤의 주장도 당시에 현실적인 영향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철학적인 담론 속에서 전개된 공허한 모색처럼 들릴 뿐이다.

    그러나 결국 이런 목소리가 있었기에 인류의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가장 인간적인 정치체제로 자리 잡아갔고,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조금씩, 조금씩 열렸던 것이 아닐까? 웃자고 그냥 던진 것 같은 이야기가 진지한 숙고의 대상이 되고, 결국 우리의 현실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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