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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원의 글줄 사이로 路] 다니자키 준이치로 『슌킨 이야기』 가장 아름답고 곡진한 사랑 이야기관리자2022-05-25

    다니자키 준이치로 『슌킨 이야기』
    가장 아름답고 곡진한 사랑 이야기

     

    글_유지원(글문화연구소 소장)

     

    「슌킨 이야기」, 다니자키 준이치로 저/박연정 옮김, 민음사, 2018


     

    책의 생각 사이로[路]
     

    다니자키 준이치로.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이름이다. 명상적인가 하면 치명적이고, 세련되었는가 하면 고아한 작가.

     

    민음사 쏜살문고의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은 디자인도 아름다워서 내게는 보물로 가득한 보물 상자같은 시리즈다. 이 보물들 중에서도 각별히 아끼는 작품을 가려 꼽으라면, 소설 두 편과 산문 한 편을 고르고 싶다. 가장 재미있는 작품으로는 「열쇠」를, 가장 서정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으로는 「슌킨 이야기」를, 그리고 내게 가장 깊은 영감을 준 작품으로는 산문인 「음예 예찬」을 꼽을 수 있다.


     

    「열쇠」는 빠른 전개로 읽힌다. 다니자키가 71세에 쓴 작품으로,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도록 끝까지 반전을 거듭하는 스릴러다. 간식에 비유하면 정크 스낵이 아니라 고급 화과자 같은데, 이것을 만든 장인은 그 완벽함이 심술궂은 경지에 이르러 손님을 감동시키다 못해 괴롭히는 지경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징그러울만큼 세련되고 정밀하게 빚어져 있다.


     

    소설의 배경은 교토. 돌려 말하고 또 돌려 말해도 조용히 눈치채는 교토 사람들의 화법은 교묘하다. 남편과 아내는 비밀스럽게 감추는 듯 하면서도 또 교묘하게 드러내는 듯한 일기로 상대방을 읽는다. 엄숙한 정절 관념의 표피 아래에 음탕한 정염이, 침묵하는 고요함 속에 득실대는 호기심이, 짐짓 자신의 호기심을 감추는 가히 묘기같은 기술 속에서 우월감을 누리려는 기이한 욕망이, 서로 모순적으로 엉켜서 나온다. 교묘하다. 네 사람이 상대 심리의 몇 수 앞까지 내다보면서 두는 음험한 바둑처럼, 소설 속 심리 게임은 얽혀 나간다.


     

    산문인 「음예예찬」은 읽어도 읽어도 새롭게 좋고 새롭게 벅차다. 1930년대를 살던 40대 후반의 탐미적인 문인이 자신 집의 인테리어를 하다가 일본풍과 서구풍 공간에 대한 사유를 풀어나가는 에세이다. 일본식 운치와 서구식 기능성 사이의 조화를 꾀해가는 과정 속에서, 다니자키는 일본식 공간으로부터 희미하게 그늘진 어둠의 풍취를 읽어낸다. 그윽한 어둠이 가진 아취, 그 탁함과 흐릿함만이 가진 세월의 깊이, 경계가 불분명한 그 몽롱함을 예찬한다.


     

    일본적 어둠을 그린 정경들 속에서는 청각과 후각, 촉각이 육감적으로 풍부해진다. 그가 칠기 그릇의 어둠에 잠긴 양갱의 빛과 감촉을 찬미한 문장을 보자.


     

    “양갱의 빛깔 역시 명상적이다. 옥처럼 반투명의 흐린 표면이 속까지 햇빛을 빨아들여서 꿈꾸듯 발그스레함을 머금은 느낌, 그 색조의 깊음, 복잡함. 양갱을 칠기 그릇에 담아서, 표면의 색을 겨우 알아볼 어둠에 잠기게 하면 한층 더 명상적이 된다. 그 차갑고 미끄러운 것을 입 속에 머금을 때, 마치 방 안의 암흑이 하나의 달콤한 덩어리가 되어 혀끝에서 녹는 것을 느끼게 되고, 맛에 색다른 깊이가 덧보태지는 듯이 여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슌킨 이야기」. 이 보물 상자같은 선집에서도 단 한 작품만 꼽으라면, 역시 「슌킨 이야기」를 골라야 하겠다. 소설을 다 읽은 순간 탄식하며 책을 내려놓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잔향의 여운이 농밀하고도 짙은 소설이다. 무엇이 독자의 마음을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등장 인물의 극에 달한 곡진한 마음이 아름다운 문장에 입혀져 독자를 이토록 철렁하게 하는 것일까.


     

    슌킨은 아름답고 뛰어난 샤미센 연주자이지만, 부잣집 딸로 태어나 장님으로 자라면서 제멋대로이고 도도한데다 조금 표독스럽기까지 하다. 슌킨의 하인인 사스케는 이런 슌킨을 향해 문학사에서 둘도 없을 지극한 사랑을 한다. 사스케의 영혼 속에서 슌킨은 승화된 예술의 궁극으로 극진하게 거듭난다. 이 지극함이 극치에 이르러 가면서 소설을 끝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던 짧은 그 순간 순전한 아름다움만으로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고 머리 위로 소름이 돋는, 미적으로 희귀한 체험을 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슌킨 이야기」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만 탄식할 뿐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명작”. 여기에 무슨 말을 더 얹겠는가.

     


     

    책의 몸 사이로[路]
     


       사진 1. 민음사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내 주요 책장은 하얀 색이고 긴 벽의 한 면을 다 쓰며 선명한 구조로 펼쳐져 있지만,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만은 따로 분류해서 어둠 속에 잠기게 해두었다. 조금 어두운 다른 서재의 낮고 어두운 책장에 넣어 두었다. 그것이 책의 정신에도 육신에도 맞아 보여서 그렇게 했다. 이 책장 안에서 표지의 무광 금박이 어둠에 잠긴 채 어둠을 어둡게 빛낸다.

     
     

    민음사 쏜살 문고의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은 2018년에 시작해서 2020년에 10권으로 완간되었다. 이 낱권들의 그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으면 ‘병풍’이 된다. 개별 작품들이 모여서 이어지다가 결국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계 전체를 이루는 셈이다.

     

    사진 2. 민음사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전체 10권의 구성. (사진 출처: 민음사 공식 블로그)


     

    이빈소연 작가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고, 민음사 유진아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이10권 선집의 색상은 세 단계로 나뉜다. 대체적으로 왼쪽부터 청년기, 가운데에 중장년기, 오른쪽은 노년기 작품으로 묶여 있지만, 반드시 시기 순인 것은 아니다.


     

    청년기의 작품으로는 「소년」, 「금빛 죽음」, 「치인의 사랑」 등이 있다. 다니자키가 도쿄에 살던 시기이고, 작품에는 서구 숭배 경향이 드러난다. 형광빛 도는 보랏빛과 묘한 분홍빛의 투 톤 색조 배치는 화려하면서도 위태롭다.


     

    중장년기의 작품에 「슌킨 이야기」가 있다. 교토와 오사카에 살던 시기이고, 작품의 관심사는 서구에서 동양으로 옮아간다. 유진아 디자이너의 디자인 후기에 따르면, 이 시기의 투 톤은 말차와 팥의 색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부드럽고 안정감 있는 색조가 감돈다.


     

    대략 노년기로 분류된 일군의 작품들에는 「열쇠」, 「미친 노인의 일기」, 「음예 예찬」이 속해 있다. 여기에 해당하는 표지는 오묘한 붉은 빛과 짙은 남색빛이 주조를 이루는데, 왼쪽의 『열쇠』에는 왼편에 중장년기의 말차색이 넘어오고 있고, 오른쪽의 『음예 예찬』은 청년기의 보랏빛으로 다시 넘어가고 있다.


     

    본문에는 산돌 정체 630을 썼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이 첫 선을 보이던 당시는 정체가 공식 발표되기 전이라서 베타 버전으로 조판했기에 본문 디자인용으로는 아직 낯선 시도였다. 산돌 정체는 연필로 쓴 듯 끝이 부드럽게 마무리 되어 있다. 미끄러지듯 쓰는 붓과 달리 연필은 종이와의 마찰이 많아 또박또박하다. 느리게 쓴 필기의 인상은 독서의 속도도 다소 느리게 만든다. 이 속도에 차츰 적응하다가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명조체를 보면, 오히려 명조체 쪽이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성격의 본문 글자체인 정체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장들이 눈에서 미끄러지거나 기억에서 바끄러지지 않도록, 꼭꼭 새겨넣기에 맞춤하다. 이를테면, 「음예 예찬」에서 서양 종이와 동양 종이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이런 문장들을. "서양 종이의 표면은 광선을 튕겨 낼 듯하지만, 봉서나 당지의 표면은 보드라운 첫눈처럼 폭신하게 광선을 지그시 빨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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