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TITLE

    [이창남의 행간 속의 사회] 그런 세대는 없다?관리자2022-05-25


    그런 세대는 없다?


    글_이창남(경북대 교수)

     

                               
    「그런 세대는 없다」, 신진욱 저, 개마고원, 2022          「세대문제」, 카를 만하임 저/이남석 옮김, 책세상, 2020



    나는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시위를 학교 교정에서 멀찍이 지켜보았었다. 그 시위는 80년대 당시 학내에서 흔히 벌어지던 여러 시위들 가운데에서 규모가 별로 크지 않은 것이었다. 시위가 끝난 이후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한 학생이 최루탄 파편을 맞아서 위중한 상태라고들 했다. 학교 옆 병원에 경찰의 진입이 예상된다고 알려지면서 학생들이 병원을 지키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교내외에서 시위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른바 민주화를 위해 독재타도를 외치며 신군부에 맞섰던 이 무렵 대학생이었던 우리 세대를 두고 86세대라고 한다. 그 세대가 30, 40 대를 거쳐 현재 50대가 되기까지, 386, 486, 586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녔다. 80년대 대학생 1960년대 출생자들이라는 의미이다. 한 때 이 세대는 민주화 세대로 불리다가 지금은 기성세대, 일명 기득권 세대로도 불린다. 실제로 지난 정부에서 2-30년전 학생대표들로 활동하던 정치인들이 텔레비전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면 대학 시절 시위 현장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세대의 공과(功過)가 있겠지만, 시대가 변하니 우리에게 부여되는 책임도 커지고, 잘못에 대한 질타도 강해지는 것 같다. 이제 약자로 보호받거나 신세대로 기대를 모으던 대학생이 아니라 어느새 남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 질타받는 세대가 된 것이다. 물론 이 세대 내부에도 다양한 그룹이 있었다.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던 일부 학생 그룹이 있었던 만큼, 바로 그 시간에 음악다방에서 클래식에 취해있는 학생들도 있었고, 고시 공부에 열을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또 대학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남들이 공부할 때 취업전선에서 일을 한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 한 반의 학생수가 60명 가량되었고, 그 가운데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은 20명 남짓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586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60년대생 가운데에서도 극히 소수이다.

    신진욱의 <그런 세대는 없다>는 이런 세대내 계급 다양성을 지적하면서 세대를 통일적인 사회학적 단위로 보는 데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회적으로 일정한 시간적 동시대성과 이념적 공유가치를 갖는다고 전제되는 세대적 통일성의 허구를 계급과 계층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서 내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근래에 유행하는 세대담론들이 586 세대를 하나의 통일성을 가진 인구 그룹으로 일반화하고, 이들을 기득권 세대로 간주하면서 청년세대와 갈라치기하고, 한 때 586이 견지했던 정치사회적 비전을 폄훼하려는 시도는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대론의 정치적 오용문제를 특히 지적하는 저자는 일견 세대론을 계급론으로 대체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계급론과 세대론을 상호보완적으로 채택해서 보다 객관적인 사회과학적 분석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대계급사회를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경쟁적인 패러다임이다.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각각의 범주에서 사회구성원들이 유의미한 통일적 경험과 세계인식을 드러내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저자의 지적 대로 그런 측면에서 세대론에 난점이 없지 않지만, 사회학적 데이터로 설명되지 않는 사회적 현상들은 많다. 가령 왜 가난한 이들이 부자 정치인을 위해서 투표하는가 ? 왜 저학력 부모들은 경쟁적 대학 시스템을 선호하는가 ? 존재가 의식을 전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세대도 계급도 사회에 대한 객관적 분석의 틀로서 한계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론의 강점은 해당 시대의 문제들과 대결하는 정신적 사회사적 경향성을 반영한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80년대 시위현장에 있었던 대학생들도, 최루가스가 날리는 거리로 빌딩 사무실에서 휴지를 던져주던 직장인들도, 난사되는 최루탄 사이로 철가방을 몰고 달리던 중국집 배달원들도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일정하게 시대의 문제를 공유했다. 만하임은 이런 공통된 경험에서 비롯되는 운명적 공동체 의식을 세대의식의 주요한 계기로 이해한다. 이는 시대의 일정한 통일성이며, 운명적 유대이다. ‘세대계급은 바로 그러한 공유된 역사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프리즘이다. 세대론과 계급론을 거슬러 올라가면 헤겔의 시대정신 (Zeitgeist) 개념과 만나게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80년대 우리를 광장으로 불러낸 것이 시대정신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한열 영결식에 금화터널과 시청을 가득 메운 수백만의 인파를 목격하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30년이 가볍게 흘렀다. 남들은 우리 586을 기득권자라고 욕할지라도 우리의 시각은 크게 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역사는 개개인의 차이들을 초월하는 흐름이고, 그것을 계급적 관점이나 세대적 관점에서 보는 데에 따라서 미래의 사회적 비전에 다소간의 차이들이 노정될 것이다. 지금의 청년세대에 이런 비전을 제시해야하는 긴급한 과제와 더불어 생각할 때 그런 세대는 없다가 바로 우리 세대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은 이유 없는 오독(誤讀)일까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