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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마의 변경에서 책 읽기] 거머리 두뇌를 연구하는 인문학에 미래가 있을까?관리자2022-05-25


    거머리 두뇌를 연구하는 인문학에 미래가 있을까?


    글_조형근(사회학자)

     

    「인문학의 미래」, 월터 카우프만 저/박중서 옮김, 반비, 2022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오직 거머리의 두뇌만을 연구하는 자를 등장시킨 바 있다. 연구자는 스스로 정신의 양심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그에게는 거머리의 지혜가 하나의 세계다. “그것을 위해 나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그리하여 나의 인식 바로 곁에는 나의 검은 무지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알고,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하는 엄격함과 정직성이다. 좁은 연구주제에 파묻혀 바깥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정신을 떠올리게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던 젊은 비트겐슈타인의 제자들인가?

    인문학의 미래1977, 미국의 철학자 월터 카우프만이 쓴 책이다. 읽다보면 21세기 한국의 대학과 인문학의 처지에 대해 말하는 것 같아 놀라게 된다. 아마 위기는 한국이 더 심할 것이다. 인문학 관련 학과들의 정원 축소, 통폐합 같은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뉴스조차 못된다. 대통령은 후보 시절, “지금 세상에서 인문학은 공학이나 자연과학 공부하면서 병행해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문학자들 자신도 비슷하다. 빌 게이츠가 철학과에 몇 달 다녔다는 에피소드를 선전하고, 돈 되는 콘텐츠의 밑바탕에는 인문학이 있다며 가치를 입증하려 한다.

    장폴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권위를 활용하되, 자기 소관을 넘어서는 영역에 월권하여 참견하는 자라고 정의한 바 있다. 예를 들어 핵무기를 연구하는 과학자는 단지 전문연구자에 그치지만, 그 사용이 가져올 파국을 경고하고 반대행동을 조직하는 사람은 지식인이다. 아인슈타인이 단지 물리학자를 넘어서 지식인인 이유다. 이 기준에서 보면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자 중 상당수는 지식인이 못된다. 거머리의 두뇌에만 몰두하고 있는 탓이다.

    카우프만이 보기에도 그렇다. 오늘날 인문학자 중 상당수가 무엇을, 왜 공부하는지 잊어버린 거머리 두뇌 연구자 같은 신세다. 목표와 비판정신을 상실한 채 전문화 속으로 침잠한 지 오래다. 인문학 전반의 위기는 다름 아니라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예를 들어 이런 구절을 보자. “종신재직권 제도의 존재 이유는 학술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수라면 해고될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서 교실이나 인쇄 매체에서나 이단적인 견해를 발전시킬 자유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즉 사회의 믿음과 도덕과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기 전공의 합의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탐사할 수 있어야 한다 .... (하지만) ... 학술지에는 종신재직권, 승진, 봉급 인상을 얻기 위해 반드시 (연구를) 간행해야 하는 사람들이 쓴 논문이 가득하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왜 위기가 도래했을까? 카우프만은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 2차대전 이후 대학의 팽창 과정에서 정량 측정의 시대가 도래했다. 학생 선발을 위해 객관식 시험이 중요해졌고, 교원의 채용과 승진 과정에서는 학계의 합의 범위 안에서 부지런히 논문을 간행하는 현학자 유형이 유리해졌다. 자기 시대를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적 비평가 유형은 소멸하게 됐다. 생각해 보면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지목한 능력주의(meritocracy) 교육개혁이 일어난 시기와 겹친다. 능력주의의 부상의 흐름은 인문학적 비판 소양의 쇠퇴 추세와 겹친다. 둘째, 1957년의 스푸트니크 충격이 미친 영향도 컸다.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학술적 진보가 자연과학 모델에 의존해야 한다는 확신이 커졌다.

    그렇다면 어떤 인문학자가 필요할까? 카우프만은 인문학자의 네 가지 유형으로 선견자, 현학자, 소크라테스형 비평가, 그리고 언론인을 제시한다. 선견자는 선견(vison)을 제시한다. 하지만 선견자는 외톨이다. 자기 시대의 상식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이들은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고, 자신의 선견을 상술하려고 지속적으로 시도한다. 이들은 대개 기존 언어가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종종 심각한 의사소통의 문제를 직면한다.”

    반면 현학자는 옛 시대의 일부 선견자는 신봉하되 자기 시대의 선견자는 부정하면서, “엄밀성과 전문가주의에 자부심을 가지며, 자기네 합의나 공통적인 요령에 크게 의존한다.” “현학자들은 자기 학생들과 독자들이 남들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려고 다짐한다.

    니체는 순간으로부터의 구원자라고 일컬은 천재 철학자에 대비하여 순간의 시종인 언론인을 대조한 바 있다. “언론인은 당일치기로, 즉 즉각적 소비를 위해 글을 쓴다.” 언론인에게는 방대한 연구를 위한 시간이 없고, 현학자의 엄밀함 선호 취향이 없다.

    카우프만이 높이 평가한 것은 소크라테스형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선견을 상술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견자가 아니었고, 현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선견자가 되지 않는 것을, 그리고 사실상 반()현학자가 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다.” 그는 당대의 믿음과 도덕을 검토했고, 합의에 대한 무비판적인 의존에 근거한 지식의 주장을 조롱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지어 가장 유명한 교사들, 정치인들, 대중적 예언자들도 포함해서) 얼마나 무지하고 혼미하고 잘 속는지를 보여주려 애썼다.”

    인문학을 배우고 가르쳐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도 카우프만은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의 보전과 육성을 위해, 둘째, 목표를 숙고하고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 셋째, 선견을 가르치기 위해, 넷째, 비판 정신을 육성하기 위해. 하나같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형벌을 주제 삼아 한 학기의 인문학 강의 모델을 제시한다. 형벌은 철학과 종교, 그리스 비극과 러시아 소설, 정치이론과 심리학, 사회학과 인류학이 만날 수 있는 학제간 접근의 대표적인 사례다.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형벌에 대해 종합적으로 사고하며, 소크라테스적 질문하기, 즉 우리의 무지, 우리 지식의 한계에 대해 질문하는 법을 배운다. 형벌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대학 안 인문학은 고사 위기에 몰려 있는 반면, 대학 밖에서는 각종의 교양 인문학이 상품으로 팔리는 시대다. 인문학에 미래가 있을까? 카우프만의 말로 대신한다. “인문학을 잘 가르친다고 해도 인류가 살아남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인문학을 잘 가르치지 않는다면 인류가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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